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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의 추억

동생이 귤 먹고 배탈 나지 않아 다행입니다.

귤을 수확하러 제주에 왔습니다. 황해도 출신이신 친정아버지는 서울에서 사업을 하시면서도 늘 농사에 대한 동경이 있으셨습니다. 조그마하나마 벼농사도 직접 지으시고, 밭도 일구셔서 늘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작물들을 수확하십니다. 제주도에서도 조그만 귤밭이 있으신데 이제는 거의 은퇴를 하셔서 직접 귤농사를 지으시겠다고 제주도에 내려와 계십니다. 팔순이 넘으신 어머니 아버지 두 분이 하실 수는 없기에 저와 동생들이 모두 나서 귤농사를 짓게 생겼습니다.




제주도에 와도 관광지나 다녀봤지 농사일은 처음이라, 귤이 잔뜩 달린 귤밭에도 처음 가 본 듯합니다. 귤이 잔뜩 달린 귤나무가 그득한 귤밭은 관광 와서 볼 때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는데 일을 하려고 보니 일 폭탄이더군요. 한 나무에서 따야 하는 귤이 어마어마하다 보니 귤을 흠집 가지 않게 잘 잘라서 분류하는 게 끝이 없네요. 대규모 농장이 아니니 다닥다닥 붙어있는 나무들 사이로 귤을 운반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고, 해가 짧아지다 보니 생각보다 일이 더디게 진행되네요. 귤을 따다가 한두 개 먹기 시작해서 귤로 배를 채우기까지 하다 보니 갑자기 약 40여 년 전, 살구를 한 가마니 먹고 배탈이 났던 남동생 생각이 났습니다.





약 40여 년 전, 농사를 짓고 싶으셨던 아버지는 경기도 이천 근처에 작은 농가를 하나 사시고 텃밭을 일구셨었습니다. 아버지는 바쁘셨기에 주로 저희 할머니와 친척 할머니들이 내려가 계시며 상추며 호박, 고추 같은 작물을 심으셨던 것 같습니다. 저희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내려가서 오디도 따먹고, 뒷산에 가서 도토리도 주워오곤 했습니다. 나무를 때던 시골 흙집 앞에는 어른들 두 명이 양팔을 벌려 손을 잡아야 할 만큼 큰 살구나무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살구는 흔한 과일은 아니었습니다. 여름마다 시골집 앞 살구나무에는 엄청난 양의 살구가 열렸던 듯합니다. 손이 크셨던 할머니께서는 살구를 동네에 넉넉히 나누어주시고 서울 집에도 3-4 가마니의 살구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여기서 가마니란 80킬로짜리 쌀가마니를 말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살구겠습니까? 그럴게 살구가 많은데, 그 해에는 유난히 살구가 달고 맛있었나 봅니다. 워낙 과일 욕심이 많은 제 밑의 남동생, 우리 집 장손께서 갑자기 이 살구가 다 자기 살구라 다른 사람은 아무도 먹지 못한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 시집오셔서 딸 셋 낳고 십 년 만에 얻은 귀한 아들인 우리 아버지의 큰아들인 제 밑의 동생은 할머니의 종교이셨습니다. 남동생의 생떼를 말리기는커녕 할머니께서는 살구 가마니들을 죄다 지하실에 감추어 놓으시고는 동생만 먹을 수 있다고 선포를 하셨습니다. 동생은 신이 나서, 우리 약 올리면서 한 바구니, 할머니 한 개씩 드리며 한 바구니, 밥 대신 먹겠다며 한 바구니 이럴게 그날 엄청난 양의 살구를 꾸역꾸역 밀어 넣었습니다. 속으로 엄청 얄미워하면서 배탈이나 나라하고 저주를 퍼부었는데, 그 때문인지, 동생은 그날 저녁, 토사곽란을 하며 응급실에 실려갔습니다. 실지로 동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라고 빌어서 그런가 하고 후회도 엄청 했지요. 동생은 삼일 이상을 병원 신세를 지고서야 집에 돌아왔습니다. 정작 동생은 입원한 동안 선물로 받은 로봇이며 블록 등에 신이 나서 돌아왔지만, 온 집안 식구들 놀란 생각 하면 진짜 죽도록 꼴 보기 싫었습니다.  




동생이 살구를 먹고 체한 다음 주, 할머니는 이천에 내려갔다 오셨습니다. 우리 가족은 그 다음번 이천에 가서 엄청난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집 앞에 있던 커다란 살구나무가 베어져 있는 겁니다. 지금 같았으면 전기톱으로 깨끗하게 잘랐겠지만, 1970년대, 할머니께서는 동네 청년들을 불러다 도끼로 살구나무를 찍어내셨던겁니다. 4 미터도 넘는 직경 2 미터도 넘는 나무가 없어진 것도 모자라 여기저기 도끼 자국이 있는 나무의 잔재는 살구나무가 돌아가셨음을 너무나도 생생히 보여주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살구를 먹을 없다는 생각과 나무가 얼마나 아팠을까 하는 생각에 우리 사 남매는 엉엉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우리 남매는 동생의 사고를 더 이상 할머니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유난히 사건 사고가 많았던 동생은 야구를 하다 안경이 깨져 눈이 멀 뻔하기도 하고, 수박을 먹다 앞니를 부러 먹기도 하는 등 끝이 없었거든요.





오늘, 끝없이 귤을 따다 갑자기 동생이 귤을 먹고 체했으면 할머니가 귤나무를 다 패버리셨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혼자 웃었습니다. 남동생은 50이 넘은 지금도 엉뚱하고 기발합니다. 본가의 너무 높이 달려 까치밥 하라고 남겨둔 감을 딴다고 담을 타려고 하질 않나, 멀쩡한 시골집 놀아두고 그 앞에서 캠핑을 하며 팔순 노모의 속을 바짝바짝 태웁니다. 그 동생이 3주 후, 자기가 제주도 와서 부모님을 도와 귤 수확을 다 하겠다며 걱정하지 말라는데, 살짝 걱정이 되는 건 왜일까요? 동생이 굴 따다 배탈이 나거나 혹시 사고라도 나면 하늘에 계신 할머니가 굴밭에 벼락이라도 쳐서 귤밭을 없애버릴 듯한 이 불길함은 뭘까요? 동생은 할머니에게 자신이 얼마나 귀하고 사랑받은 장손이었는지 알고 있을까요? 힘은 들지만, 그래도 동생이 와서 무사히 귤 수확을 도와 내년에도 이 귤을 먹고 싶네요.




귤 따기 싫어 꾀부리다 생각난 살구의 추억, 그래도 글 쓰느라 한 시간 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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