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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 Jul 29. 2020

저녁에는 클래식을 들어요.

내가 유일하게 느려도 되는 순간

 누가 그랬던가? 옛 가요를 찾아 듣는 순간 늙은 거라고. 음악 차트 상위에 랭크된 가요들이 영 취향에 맞지 않아 "예전 노래가 최고지!"라며 3년 전에 만들어 놓은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하는 순간, 기성세대로 입성하는 거라고. 이  말을 듣자마자 소름이 끼쳤다. 맞다. 나는 2년 전부터 내가 학창 시절에 즐겨 들었던 노래들만 듣기 시작했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라든지, 2pm의 '10점 만점의 10점' 이라든지. 흔히 말해 '요새 노래'들은 도무지 귀에 착 달라붙지 않는다. 아침을 준비할 때나 청소를 할 때는 뭐니 뭐니 해도 '예전 그 노래'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예전 노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예전 노래인, 클래식이 나의 하루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왜 듣기 시작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다만 스미듯 천천히 클래식의 세계에 입문했을 뿐이다. 때때로 나는 너무 많은 생각이 내 머릿속을 부유하는 까닭에 힘에 부친다. 그 생각들이란 주로 과거 일에 대한 반성, 앞으로의 목표에 대한 고민, 결핍된 것들에 대한 집착이다. 클래식은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이 노래 뭐지?'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기 때문에, 너무 많은 생각 속으로 침잠하는 나를 건져 올려 준다.


  내가 주로 클래식을 듣는 순간은 저녁 시간이다. 퇴근 후 저녁 시간은 오로지 나만의 시간,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기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다. 나만의 클래식 감상에는 나름의 루틴이 있다. 일단 음악과 함께 할 차를 우린다. 주로 카페인이 없는 루이보스 티나 연잎차를 즐긴다. 그 후 음악 어플로 '클래식 랜덤 재생'을 검색한다. 그러면, 어디선가 많이 들어봤던 클래식이 흘러나온다. 길거리에서, 백화점에서, 카페에서 생각 없이 들었던 음악들이기 때문에, 조건반사적으로 나는 '아무 생각도 없는 상태'가 된다. '생각 없음'의 상태를 지향하는 나에게 이보다 더 좋은 안정제가 있을까? 또, 세상으로부터 나를 효과적으로 차단해주기도 한다. 클래식을 들으며 일기를 쓰고 있노라면 세상과 단절된 채 나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

다이어리 쓰면서 클래식 듣는 시간이 제일 좋아!



 가장 조회수가 높은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하다 보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클래식을 주로 듣게 된다. 특히 비발디의 사계나 쇼팽의 녹턴 같은 곡들은 어떤 플레이리스트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언제 들어도 하던 일을 멈추게 하는 곡이 있다. 바로 베토벤 '비창' 2악장이다. 특히 피아니스트 조성진이나 백건우가 연주한 비창을 틀어 놓으면, 나는 홀로 있는 내 방안에서도 외롭지 않다. 살다 보면 벅차고 즐거운 날도 있고 이유 없이 우울하고 괴로운 날도 있는데 '비창'은 내 기분과 상관없이 나를 지지한다. ('위로'라기엔, 위로가 필요치 않는 날에도 내게 힘이 되기 때문에 '지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베토벤의 비창은 내가 어떤 하루를 살았든지 간에 포근히 안아주며 '오늘도 참 잘 해내었다.'라며 토닥여준다. 베토벤이 청력을 잃어가면서 쓴 곡답게 많은 이들이 '슬픔'의 정서를 느끼는 곡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내 삶을 지탱해주는 응원가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xaHjlsGo1ck (가장 자주 듣는 조성진의 '비창' 2악장)



  지나치게 현실적인 나는 사회적 시계에 맞춰 살기 위해 부단히 도 노력해 왔다. 내 나이에 걸맞은 연차의 직장인이 되었고, 매일 성실하게 출근하면서도 마음 한편은 항상 불안하다. 심장이 조여드는 경쟁이 너무 익숙한 나머지 '불합격'이라는 글자만 봐도 심장이 내려앉는다. 클래식은 그런 나의 일상에서 유일하게 '느려도 되는'순간을 선사한다. 클래식은 가사가 없기 때문에 클래식을 듣다 보면 오늘의 내 기분이 어땠는지 들여다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골똘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내일은 어떤 업무를 하지?', '내게 남은 목표는 무엇이지?'라는 숨 가쁜 고민은 잠시나마 내 것이 아니게 된다.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굴러가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었던 내 삶에 쉼표 같은 순간들이 되어주는 클래식 음악을, 나는 너무나도 사랑한다.


<내가 주로 듣는 플레이리스트>

Listz, Ständchen,S560 no7  Ständchen (From Schwanengesang, D957)  

Rachmaninov, Vocalise,op34(Version For Cello And Piano)  

Faure, Apres un rêve (Version For Cello And Piano)

Chopin, Nocturnes, op.48 no1, no2   

Philip GLASS, Études - No. 20   

Eric Satie, gnossiennes  

Brahms, 4 Klavierstüke, op119, B minor  

Bach, Concerto in D minor BWV.974

Gluck, Orfeo ed Euridice,wq30: Melodie

Beethoven, Piano Sonata no14, c#min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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