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 학교 아이들이 '말 잘 듣는 아이들'이 아니어서 좋다. 우리 학교 아이들에게 어떠한 규칙을 가르치려면 그저 전달해선 안 된다. 바로 '왜요?'라는 물음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런 물음을 던지는 아이들에게 되려 내가 묻고 싶었다. '대체 그 이유를 왜 묻니?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될 것을!' 학창 시절, 규칙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여기고 고분고분 순응했던 나는 요즘 아이들의 이러한 태도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더랬다. '말 안 듣는' 요즘 아이들은 규칙이나 관습을 절대 무조건적으로 순응하지 않는다. 의심해보고 그것이 정당하다고 느껴질 때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규칙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고분고분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점심시간이 지나치게 짧으니 늘려달라'라고 교장실로 직접 찾아가 항의한 적도 있으니, 더 긴 설명은 필요가 없겠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당당히 표현할 줄 알고 스스로의 욕구에 충실한 학생들이 참 대견스럽다. 당돌함과 무모함을 무기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중2병'이라 규정한다면, 그것을 구태여 고쳐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늘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학교의 규칙들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고민하는 도중에 정당하지 않거나 필요치 않은 규칙들이 있음을 깨닫고 되려 반성하는 경우도 많다. 일례로, 우리 학교에는 '체육복을 입고 등교해선 안 된다'는 규칙이 있다. 어느 날 몇몇 아이들이 어김없이 '왜 꼭 교복을 입고 등교해야만 하냐'는 질문을 했다. 나는 '체육복은 체육 시간에 입기 위한 것이니까.'라고 답했지만, 스스로도 석연치 않았다. 며칠간 깊이 고민한 끝에 나는 아이들이 던진 불만이 지극히 정당하며, 그러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체육복 역시 학교에서 정한 교복 중 하나라는 것, 한창 성장기인 중학생 아이들에게 초등학교 졸업 직후 산 교복은 지나치게 작을 확률이 높다는 것,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등교한다고 해서 학교 이미지가 좋아질 가능성은 만무하다는 것, 그보다는 아이들이 편안한 옷을 입고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이상하게 변형한 교복보다 체육복이 훨씬 단정해 보인다는 것.... 아이들이 체육복을 입고 등교해도 되는 이유는 무궁무진했다. 중학교의 아이들은 반항끼 넘치고, 싸우기도 잘 싸우고, 대들기도 잘 대든다. 나는 아이들의 이런 무모함을 사랑한다. 교사로서 아이들의 정당한 반항을 지지하고 싶다. 가끔 정당하지 않은 반항이어도 좋다. 그것 역시 넘치는 생명력을 반증하는 것이기에. 그 생명력이 학교를 생동감 넘치는 공간으로 만들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