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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리별 Aug 11. 2024

은행원 김지원

#1. 합격의 순간을 기뻐하는 것이 맞았을까요


"김지원 님은 신비은행 제25회 신입행원에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하. 미친... 합격이다!'


얼마나 가슴 졸이며 채용 팀에서 온 메일을 열었던지, 합격이라는 안도에 지원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괜찮은 4년제 대학 인문학과를 나온 지원은 문과라는 불리함을 극복하고자 경제학 복수전공, 경영동아리, 대외활동 등 각종 도움이 된다는 스펙을 쌓으며 변변한 연애도 해보지 못한 5년을 보냈지만, 지난해 첫 취업 도전에서 원하는 회사에 전부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집안 사정상 여유롭게 전문직 공부를 하거나 진로 탐색을 해 볼 여력이 없었기에, 두 번째 취업 시즌에는 전력투구를 하겠다는 독한 마음으로 처음보다 더 많은 회사에 입사 지원서를 넣었다.


결국 그중 딱 한 곳, 신비은행에 합격하게 된 지원.


사실 주변 사람들은 내성적이고 말주변 없는 지원이 은행에 입사지원서를 넣었다는 말에 영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며 말렸던 터였다. 하지만, 직업이자 돈이 필요했던 지원에게 직무적합성을 고려한다는 것은 사치였다.


막상 합격을 하고 나니 은행원이라는 직업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과 영업을 해야 한다는 현실이 무겁게 다가왔지만, 그래도 먹고살 걱정이 해결되었으니 부딪히며 생각해 보기로 했다.


'헤헤. 오늘 저녁은 참치마요나 전주비빔 말고 도시락이라도 먹을까.'  




기다렸던 신입 사원 연수 날.


은행 본사 앞에 모여 버스를 타고 경기도에 있는 연수원으로 이동한다고 했다. 일찍 도착한 지원은 한껏 힘준 화장과 차림새들 틈에서 자신과 결이 비슷할 것 같은, 수수한 느낌의 동기를 찾아본다.


지원: 저, 괜찮으면 옆에 앉아도 될까요?

혜수: 네, 앉으세요. ^^

지원: 아,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혜수: 저 xx 년 생이요. 나이가...?

지원: 오, 저도 xx 년 생이예요. 혹시, 복수 전공하셨거나 해외연수 다녀오셨어요...?

혜수: 아, 저는 CPA 2년 했었는데 적성에 안 맞아서 진로를 틀었어요.

지원: 그러시구나, 암튼 반가워요. 연수원 좋다고 들었는데 기대되네요.

혜수: 맞아요. 아빠가 그러시는데 좋아졌대요.

지원: 아빠요...? 아빠가 신비은행에 다니세요?  

혜수: 네, 저희 아빠 종로 쪽에 지점장으로 계시거든요.

지원: 와... 좋으시겠어요.  

혜수: ㅎㅎ 지점장님 자녀들 저 말고도 있어요. 소문으로는 다른 은행 부행장님 자녀분도 있고, 은행 VIP 자녀분들도 있다던데요?


화장기 옅은 얼굴에 똑 단발을 한 혜수가 자신과 같은 부류일 것이라 기대했건만, 대화는 예상치 못하게 흘러갔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의 성함과 직업을 쓰는 란이 지원서에 있었던 같기도 하다. 하긴, 영업을 시키려면 영업에 유리한 사람을 뽑을 수밖에 없을 텐데 기준 하나가 부모님 직업이겠지.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지만, 웅장한 자태의 연수원을 보자 이내 기분이 좋아졌다.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가 교재를 나눠 받고, 수업을 시작하기 전까지 지원의 기분은 최상이었다. 그래도 나름 좋은 학교를 나온 자신이 연수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고 핵심적인 부서나 영업점으로 배치되길 희미하게 상상해 보았다.




- 이런 경우엔 현금과 대체를 나누어서 입금해야겠죠.

- 이건 책임자 전결이고, 또 이런이런 업무는 지점장님 전결입니다.

- LTV, DTI, DSR은 이렇게 계산합니다.


상상은 상상일 뿐.


연수원에서의 시간이 누적될수록, 지원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마주하는 개념이 채 이해되기도 전에 새로운 정보가 밀려왔고, 이해도 암기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매일 쪽지시험을 보아야 했다.


은행 입사를 철저하게 준비해 온 다른 동기들과 지원은 시작부터 흡수력이 달랐다. 결국 매일 나머지 공부를 하며 취업 재수로 가뜩이나 움츠러들어 있던 지원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하... 내가 이렇게까지 돌대가리였다니. 쪽팔린다.'


지원과 비슷한 상황을 겪는 동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연수를 중도 이탈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지만, 또다시 치열한 취업전선으로 뛰어들어 승리할 자신이 없었던 지원은 버티고 또 버텼다. 자존심이 밥 먹여주냐며.


드디어 연수의 마지막 날, 각자 배치될 영업점이 발표됐다. 시험 1등을 도맡아 하던 현수는 강남의 자산관리 전문 지점으로, 예쁜 외모로 주목받았던 소희는 본사 영업부로, 금수저로 유명했던 훈은 압구정 중심부로 발령이 났다.


그리고 지원이 발령받은 곳은 유동인구와 내점인구가 많은, 수도권 귀퉁이의 한 점포였다. 일 배우기에 딱 좋은 곳. 그러나 그 누구도 자원에서 가려고는 하지 않았을 지점에서 지원의 본격적인 은행 생활은 시작되었다.




 <글쓴이의 말>

안녕하세요, 해리별입니다. 제가 지금 쓰고 있는 '은행원 김지원' 시리즈는 분명한 픽션임을 말씀드립니다. 요즘 유행하는 변호사 관련 드라마를 보며 은행원 관련 소설을 문득 써 보고 싶어 져 순식간에 1편을 쓰게 되었네요. 있을 법 한 허구의 이야기로 더 재미있는 2편, 3편... 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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