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성철 Sep 15. 2020

시간을 만지작거리며  

내가 없어도 지구의 공전과 자전은 멈추지 않는다.

          

1999년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슬로시티’란 운동이 있다.

패스트푸드의 반대 개념인 슬로푸드와 함께 느리게 살기 운동이다.

자연과 전통문화를 잘 보호하여 양질의 삶 속에서 인간다움을 되찾고자 하는 사회 운동으로 우리나라에는 하동, 담양, 완도, 전주, 예산 등이 가입되어 있다.   


한 번쯤 한없이 느리게 살고 싶을 때가 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고 두 눈을 감는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잡다한 생각이나 일정들을 모두 지우고, 대자연에 몸과 마음을 맡기려 한다.

삶이라는, 삐거덕거리는 기계의 부속품에서 빠져나와 한 발 물러서 지켜보고 싶다.

내가 없는 사회를, 조직을, 한 편의 영화를 보듯이 담담하게 바라보고 싶다.


내가 없으면 회사나 조직이 멈춘다는 기계적 언어에서 벗어나자.

내가 빠지면 기계가 멈춘다는 생각을 버리자. 

정말 당신이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당신은 이미 기계의 부속품이다.

그것마저 행복이라 여기면 당신을 탓할 생각은 없다.

다만, 당신의 정신적 여유가 가족이나 주위 분들에게 두 배의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

지구의 모래나 흙을 한 트럭 담아 우주에 버려도, 지구의 공전과 자전은 멈추지 않는다.

지구가 나를 중심으로 공전과 자전을 하지 않는다.

지구의 시간은 무한대이고 우리의 시간은 유한임을 기억하자.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라는 설화가 있다.

나무꾼이 신선 두 분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다 정신을 차리니 도낏자루가 썩어 있을 정도로 세월이 흘렀다는 이야기다. 일하기 싫은 나무꾼이 자루가 썩은 도끼를 들고 간 것이 아니라면, 모든 근심사 내려놓고 신선들의 놀이에 폭 빠져 삼매의 경지에 들었다는 이야기다.

나도 세상사 잊고 삼매에 빠진 적이 있었다. 지구의 공전과 자전에 맞서 역주행을 했었다.

마주 오는 관습과 구태에 정면충돌해,  다친 상처를 부둥켜안고 술의 삼매에 주 3회 이상 빠져 살았었다.

그럴 때마다 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지금도 해야 할 일을 제때 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사람을 ‘신선놀음하고 있네!’라고 말한다.

도인, 도사, 선인의 반열인 신선에 비유하니 게으름도 한 번은 피울만하다.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대표작 『기억의 지속에는 녹아내리는 시계가 그려져 있다.  

시간이 액체가 되어 흐느적거리며 바닥으로 툭 떨어질 것 같다.

책상의 모서리에 걸쳐 있는 시계는 7시 5분 전을 가리키고 있다.

밑그림의 색이 어두운 색이라 저녁 7시 5분 전이 아닐까 추측한다,

달리에게 7시 5분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다.

마음의 혼란이든 시대의 혼란이든 벗어나고 싶은 내면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행복했던 한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욕망일까?

미술 전문가는 아니고 단지 내 느낌뿐이니 질문은 정중하게 사절한다.

 

아이들 장난감인 ‘슬라임(Slime)’이라 하는 ‘액체 괴물’이 있다.

액체와 고체의 중간 정도인 말랑말랑한 촉감의 ‘슬라임’을 만지면 심리적으로 안정을 얻을 수 있어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다. 시간도 슬라임이나 녹아내리는 시계처럼 자유자재로 늘이거나 줄일 수 있다면, 사람이 시간의 노예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마음의 안정을 가질 수 있으리라.     


휴일, 아침잠에서 깨어나 눈은 떴지만 일어나지를 못한다.

오늘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을 맴돌고 몸은 모든 것을 거부한다.  

피곤하기도 하지만 아무런 생각 없이 이대로 가만히 있고 싶을 뿐이다.

일으켜 세우려는 나와 또 다른 나와의 지루한 싸움 사이에 머릿속은 더욱더 복잡해진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바라보면 마음이 더 조급해진다.

서두르는 초침은 과거의 한 지점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냉정하게 지나간다.

째깍째깍 소리는 상처! 후회! 라는 여음을 남기고, 아픈 기억을 소환해 날카롭게 찌르고 무심히 지나간다.

게으름도 머리가 텅 비어야 가능한가 보다.


모든 잡념과 오늘이라는 시간마저 잊으려 애를 써 본다.     

세월이 게으름을 피우고 천천히 흘러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삶이 슬로비디오처럼 느리게 갈 수는 없을까?

빠르게 가는 시간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별스러운 생각을 다 해본다.


마음만이라도,

‘살바도르 달리’의 녹아내리는 시계를 진흙처럼 뭉쳐 마음껏 주물럭거리며 사나흘 지내야겠다.  

신선의 세계로 들어가 유유자적하며 오늘과 내일을 ‘슬라임’ 속에 집어넣어, 만지작거리며 마음의 평화를 찾아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별에서 만나자는 약속도 없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