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84)
써 보고 싶은 글이 생겨서 깨작깨작 독일어 공부를 조금 했다. 대학 때 교양 수업으로 기초 독일어를 배우긴 했지만 기억나는 거라곤 인사말 몇 개와 아인스, 츠바이, 트라이, 피어(1,2,3,4) 뿐. 그럼에도 무지막지하게 생경한 느낌을 받지 않았던 건 프랑스어를 구사한다는 이유로 몇 가지 문법적 특성을 쉽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명사가 성(性)으로 구분된다거나 인칭에 따라 동사의 어미가 바뀐다거나 하는 문법들.
남성/여성, 프랑스어처럼 성이 두 가지로 나뉘는 것도 짜증 나는데 얼씨구, 독일어는 '중성' 명사까지 거든다. 어학 시험을 볼 건 아니니 달달 외우지 않고 한 눈으로 보고 한 눈으로 흘려보내면 그만이었다. 인칭에 따른 동사변화도 프랑스어에 비해 덜 복잡해(보여)서 '애걔, 고작 이 정도야?' 하고 넘길 수 있었다.
조금 더 복잡해진 문법을 마주할 즈음부터 과연 독일어의 특성을 글감으로 삼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분리동사? 한 문장 안에서 동사가 나누어진다고? 그러고 보니 교양 수업 때도 마지막 시간인가 동사가 나눠진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더랬지... '분리전철'이라고 명명된, 접두사처럼 잘 붙어 있던 아이는 단어가 아닌 문장 차원에선 맨 뒤로 떨어져 나간다. (이러지마, 제발)
'anrufen'이라는 단어를 예로 들겠다. 뜻은 전화하다. "당신이 나에게 전화한다"는 문장은 아래와 같다.
Sie Rufen mich an
우리말로 빗대어 보자면, 단어 수준에선 '전화하다'라고 동사를 있는 그대로 쓰다가 문장 수준에선 '나에게 화한다 전'이 되는 식이다. 'rufen'만 따로 검색해 보니 외치다는 뜻이다. 그럼 꼬리표처럼 붙는 'an(안)'이라는 사소하기 그지없어 빨리 말하면 잘 들리지도 않는 분리전철이란 이 녀석을 캐치해야만 전화한다는 정확한 뜻을 파악할 수 있다는 건데... (이러지마, 제발)
이와 관련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특성은 바로 어순이었다. 동사의 위치가 그야말로 제멋대로다. 평서문에선 두 번째 문장 성분은 무조건 동사여야 한다는 규칙은 있는데, 조동사가 달라붙으면 일반 동사가 맨 뒤로 튕겨져 나가기도 하고, 그 사이에 목적어나 부정어가 끼어들면 뒤죽박죽이 된다. 동사도 쪼개버리는 마당이니 뭔들 못하랴, 라는 건가.
프랑스어 강의를 할 때 한 수강생이 '프랑스어는 주어+동사+목적어' 어순이지 않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직 '나를, 너를, 그/그녀를' 등 인칭대명사의 목적어를 배우기 전이었다. 문법 진도와 상관없이 익히 알 법한 '쥬뗌므(Je t'aime)'를 알려 주다가 생겨난 질문이었다.
"나는 철수를 좋아한다"처럼 인칭대명사가 쓰이지 않으면 영어처럼 주어(나는) + 동사(좋아한다) + 목적어(철수를) 순서다. 철수가 '너를'이 되어버리면 우리말 어순처럼 나는(je) 너를(t') 사랑한다(aime)가 된다. 목적어가 인칭대명사의 형태로 들어가면 어순이 바뀌니 무조건 'SOV' 어순으로 외우면 안 된다고 덧붙였다. 그 수강생은 뭐가 그리 복잡하냐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독일어를 살짝 들춰보니 SVO와 SOV가 혼재하는 어순 정도는 약과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초적인 발음과 문장을 끄적여보는 단계라 한국어나 영어/프랑스어적인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순이 툭툭 등장하는 예시를 자세히 들 순 없지만, 대학 시절 '독일어가 프랑스어보다 어렵구나'라고 떠올린 기억을 새삼스레 다시 떠올렸다.
+) 여담
월드컵 이후로 손흥민 관련 숏츠나 피드가 알고리즘으로 등장하곤 한다. 그중 하나가 유창한 독일어로 인터뷰하는 영상인데, '세상에, 시합 뛰고 훈련하기도 바쁠 텐데 독일어는 또 언제 공부했대', 감탄을 연발했다. 운동만 월드클래스로 잘 하는 게 아니라 어학 능력까지 비상하다며 뜬금없이 세상은 불공평해(?) 따위의 생각을 하는데, 아... 고등학교 때 독일로 갔다고... 역시 외국 말은 어릴 때 배워야 하나... (축구에 아예관심이 없어서 그가 어느 팀에서 뛰었는지 등 이력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