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90)
후쿠오카에 있는 책방 한 곳에 들렀다. 인스타그램에서 사진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찾아간 건데, 알고 보니 지점이 두 곳이었고 하필 전시는 다른 곳에서 진행 중이었다. 내 머쓱함에 덩달아 머쓱해하는 직원은 그리 멀지 않다며 교통편을 알려주었지만 시간적으로도, 일정 면에서도 애매한 구석이 있어 가면 다음날 가기로 했다. 그래도 뭐 책방에 왔으니 온 김에 책이나 한 권 사가자며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직 일본어로 책을 술술 읽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서 너무 어려운 주제의 책이라거나 맥락을 정확히 파악하며 묘사도 따라가야 하는 소설보다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찾았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책이 바로 이타미 주조(伊丹十三)의 유럽 따분함 일기(ヨローパ退屈日記)였다. 배우이자 감독인 저자가 유럽에 오래 머무르게 되면서 기록한 에피소드를 엮은 책인데, 유럽 여행을 좋아해서 세 번이나 다녀왔고 프랑스에 살기도 했던 내게 왠지 모르게 딱 알맞은 책처럼 느껴졌다. 도입부를 스르륵 읽었는데 해석하는 게 무지하게 어렵진 않았어서 사버리고 말았다.
여기서의 대반전. 저자는 1933년생. 즉, 할아버지뻘인 세대였기에 지금보다는 더 예스러운 표현과 한자를 썼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걸 모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읽어야 했으니... 생전 처음 보는 한자를 사전에 검색해 보면 이미 다 아는 단어였다. (예를 들어 더럽다는 단어 '키타나이'가 내가 배운 한자가 '汚い'지만 저자의 표현에선 '穢い'였다. 모양만 봐도 거의 뭐 중국어 간체와 번체의 차이 같다) 배경이 유럽이라 온갖 외래어가 난무했는데, 이 녀석 때문에도 술술 책을 읽지 못했다. 원어 표기 따윈 없었다. 일본어로 외래어를 표기하는 가타카나로만 되어 있어 글자는 읽었지만 정확히 어떤 외래어인지 파악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곤 했다. 책에 나온 단어는 아니지만 쉬운 예를 들자면 한 글자씩 '마...끄도...나...르도...'하고 읽긴 읽었다만, '마끄도나르도?' 하고 이게 무슨 뜻인지 한 차례 갸우뚱했다가 겨우 '아, 맥도날드!' 하고 알아차리는 식이랄까. 그마저도 사전에 없는 고유명사 같은 건 그런 이름이겠거니, 짐작 정도만 할 수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책의 페이지를 더는 쉽게 넘길 수가 없었더. 첫 에피소드가 바나나를 귀에 꽂은 영국 신사를 기차에서 만난 이야기라 폭소하며 읽었는데(근데 '따분함 일기'가 제목이어서 더 웃겼다) 그 재미마저도 내 능력치의 범주에 없는 한자와 가타카나에 짓밟히며 반감되어 버렸다. 이 책으로 무슨 논문을 쓸 것도 아니니 맥락이 짚이지 않거나 초장에 이해가 안 되는 챕터는 과감히 생략하면서 읽어나갔다.
어쩌다 보니 책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사실 이 글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따로 있다. 저자가 1960년대 파리의 거리를 보며 한 생각이 내가 했던 생각과 딱 맞아떨어진다는 것. 쉽게 읽히는 챕터만 읽자며 휙휙 책을 넘기던 중에 눈에 딱 들어온 구절이라서 그 절묘한 우연 덕분에 뇌리에 더 깊게 박혔는지도 모르겠다. 파리야 워낙 많은 이가 찾는 도시라서 비슷한 감흥을 느낀 게 딱 나와 저자뿐만은 아니겠지만, 지루해지던 독서에 한 줄기 빛처럼 공감의 여흥이 반짝 빛났던 부분이라 글로 기록해두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別にそれほどパリ好きになったわけでもない。
ただ、とても美しい街だと思っています。
街、という、どんなにでも勝手気儘に穢くなりうるものが、
あんなに美しいままの姿で存在し続けているという事実、
これが実に難しく思われるのです。
: 딱히 그 정도로 파리가 좋아진 것도 아니다. 그저 진짜 아름다운 거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거리,라는, 내키는 대로 더러워질 수 있다는 것이 저렇게 아름다운 채로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이 실로 난해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파리를 애증의 도시라고 부르곤 한다. 살면서 마주한 자질구레한 불편함이나 이해하려고 들면 더 이해할 수 없는 문화적 차이나 소통 오류 따위를 맞닥뜨리며 마냥 저냥 좋았던 파리에 점점 '증'의 기운이 스며들었다. 그런데도 살던 당시의 사진첩을 훑어보면 희한하게도 파리의 길거리 사진이 참 많이도 담겨 있었다. 이제는 어느 골목인지 그 이름도, 그 위치도 기억나지 않는 거리의 사진이. 팍팍한 삶을 사는 와중에도 파리의 거리가 품은 묘한 아름다움을 마주할 때면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곤 했다는 걸, 후쿠오카에서 사 온 저 책을 읽다가 새삼스레 깨달았다.
인용구에선 내키는 대로 더러워질 수 '있는'이라고,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식으로 표현했지만 파리의 거리가 그리 깨끗하지 못하다는 건 세간의 편견 중 하나인건 자명한 사실이다. 물론 오래된 가이드북에서 묘사하던, 곳곳에 방치된 개똥이 밭을 이룬다는 정도의 더러움은 요즘 모습과 거리가 멀지만 깨끗한 거리라고는 할 수 없는 게 또 파리의 거리다. 더럽다와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나란히 쓰는 건 모순이지만, 외관의 아름다움보다는 파리가 가진 분위기 자체에 묻어난 아름다움은 확실히 내게는 건재했다. '더러워질 수 있다는 것이 저렇게 아름다운 채로 계속 존재한다'는 표현이 그래서 와닿았나보다. 이제는 애증, 두 글자 중에 '애'쪽으로 좀 더 기울도록 하는 파리의 거리가 품은 미학적 감흥을 왜 파리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답으로 선뜻 내보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