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92)
아는 분이 집에 떡을 보냈다. 맛 한 번 보라고 보냈다는데 맛 한 번 보는 정도라기엔 양이 많았다. 인절미, 흑임자 인절미 두 종류를 두 박스씩, 참 넉넉한 인심이었다. 도보 십 분 거리에 사는 사촌 집에 나눠줘도 혼자 먹기에 너무 많은 양이었다. 워낙 떡을 좋아하고 한 번 어떤 음식에 꽂히면 질리도록 먹는 평소 식습관을 감안하면 많다고 호들갑 떨더니 생각보다 빨리 먹어치울지도 모르는 양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총 두 박스 분량의 떡은 실온에 꺼내두고 하루 이틀 안에 다 먹을 수 있는 양은 아니다. 그러니 꾸역꾸역 정리되지 않은 냉동실을 덕분에 정리하기까지 하며 공간을 마련해 살포시 넣어 얼려두기로 했다. 오래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한 번 언 떡은 먹으려면 의외로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한다. 해동을 해야 하기 때문. 당장 떡이 당겨서 언 떡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어도 되지만, 먹기 좋은 온도에 먹기 좋은 말랑함이 전자레인지 조리로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조금 방심해서 몇 초만 더 돌려도 잡고 들어 올리면 주르륵 흘러내릴 정도로 찰기가 다 흐물흐물해진다. 긴장의 끈을 바투 잡고 적당한 말랑함을 지켜냈다 싶어 손으로 확 잡아채는 순간, 안쪽에 도사리고 있는 열기가 갑자기 손끝에 전달되어 '아, 뜨거워!' 하고 짚었던 떡을 도로 놓게 되기도 했다. 당장 입에 떡을 넣고 오물오물 씹고 싶은 식욕을 간신히 다스리며 실온에서 서서히 해동시키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자기 전 락앤락에 고이 모셔 식탁에 꺼내 둔 떡은 자고 있는 동안 원래 품고 있던 찰기와 쫀득함과 말랑함을 찾아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으로 떡을 먹어야지, 잠들기 전의 계획은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하루는 화장실에 가려고 잠에서 깼고, 하루는 악몽이라고 하기엔 악하진 않지만 께름칙한 구석이 있는 꿈을 꾸다 잠에서 깨어 냉수 한잔 들이켜려고 거실로 나갔다. 화장실과 거실로 나가다가 눈에 들어온 건 어둠 속에서 콩고물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해동된 떡이었다.
결국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를 짚어 먹고 만다. 비몽사몽한 채로 말이다. 떡 하나 먹고 바로 또 잠들 건데 구태여 지금 떡을 먹어야 하나, 떡을 씹으면서도 현실을 자각하지만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이고 턱은 턱대로 저작운동을 이어간다. 하필 또 떡이 두 종류일 건 뭐람. 인절미만 먹자니 까만 고소함으로 무장된 흑임자를 안 먹을 수가 없었다. 아침에 먹겠다던 떡을 두 개나 먹고서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입은 텁텁하고 속은 더부룩했다. 다이어트할 때 줄여야 하는 탄수화물 중 복합이랬나 가공이랬나, 떡이 포함되는 무슨무슨 탄수화물을 제일 먼저 피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 무슨무슨 탄수화물의 위력이 꽤 대단하다고 실감하는 아침이었다. 고작 떡 두 개를 먹었는데 아침부터 찝찝한 기분을 느껴야 했으니까. 곧바로 이튿날엔 자다 일어나서 떡을 안 먹겠다더니 이틀을 내리 먹어버린 걸 보면 나도 참 떡을 많이 좋아하긴 하나 보다. 자다 일어나서 아무도 없는 거실에 나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타령을 셋째 날부터는 하지 않은 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어흥!',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는다고 엄포를 놓던 호랑이도 떡 좋아하는 거로는 내 앞에서 꼬리 내리고 도망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