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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rnweh Apr 11. 2023

자취를 감춘 나의 바지에게

단상 (95)


 바지는 늘 잘 개어서 서랍에 넣어 둔다. 치렁치렁 눈에 보이게 걸어두는 걸 안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바지만 따로 모아 걸어둘 공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장 바지야 집게가 있는 바지 걸이나 가운데 틈이 있어 바지를 재킷이나 셔츠와 같이 걸 수 있는 옷걸이에 정장별로 나누어 걸어 두기는 한다. (정장이라 봐야 몇 벌 없고, 그마저도 바지 하나는 지난달에 결혼식 가려고 급하게 입다가 터졌다...)


 빨래를 몰아서 하는 편이라 한 번 빨래를 돌릴 때 예닐곱 벌의 바지를 빤다. 잘 마른 바지를 하나씩 착착 개어서 늘 넣는 서랍에 넣었다. 


... 고 생각했다. 

 어느 날, 남색 면바지를 입으려고 서랍을 열었는데 서랍 안에 바지가 없는 게 아닌가. 며칠에 어떤 바지를 입었고 그 바지를 언제 빨았고, 이런 세세한 사항을 다 기억하며 살지 않기 때문에 근래에 입고 빨려고 빨래 바구니에 넣어 두었을 거라 여기고 다른 바지를 꺼내 입었다.



 며칠 뒤, 모아둔 빨래를 세탁기에 넣는데 빨래통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남색 바지는 없었다. 신었는지 안 신었는지 신발을 벗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페이크삭스 같이 작은 옷이야 어디에 흘려두고 못 찾는 거겠거니 하겠는데, 눈에 보이지 않을 리 없는 바지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물론 이 남색 바지가 내게 엄청 소중한 물건이어서 기어코 찾아내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봐야 바지일 뿐.  소중한 사람이 소중한 날 평생 소중하게 간직하라고 준 선물이라거나 가보로 내려오는 바지 같은 게 아니다. (그랬으면 평상시에 입지도 못했을 테고) 최근에 어디 여행을 갔다 왔다거나 외박한 적도 없으니 집 아닌 다른 곳에 벗어두고 왔을 리도 없다. 남색 바지 밖에 입지 못하는 드레스코드가 있는 어딘가에 나갈 일도 없다. 어디 굴러다니고 있겠지, 남색 바지의 존재는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차츰차츰 잊혔다.


 녀석은 의외의 곳에서 발견되었다. 며칠 전, 캐주얼 셔츠를 입으려고 옷장에서 꺼냈다. 꺼내는데 하늘하늘한 셔츠의 무게라기엔 꽤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셔츠의 오른쪽과 왼쪽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니 그 안에 감쪽같이 사라졌던 남색 바지가 걸려 있었다. 바지걸이용으로 난 옷걸이 가운데 틈으로 절반을 대롱대롱 아래로 떨구고 있는 채로. 그 모양이 왠지 날 골탕 먹이려고 '메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심술이 났다. 바지를 찾은 게 기뻤던 건지 오늘 덥석 남색 바지를 입고 나왔으니 심술도 잠시였나 보다. 


 습관이 무섭다더니 그리 무서운 것도 아니었다. 매번 서랍에 넣는 습관도 아주 잠깐 방심한 사이 무너져 뜬금없이 옷걸이에 바지를 걸어 옷장에 넣어 두었으니까. 그걸 또 셔츠로 꽁꽁 가려놓을 건 뭐람. 혹시 비상금이라도 숨겨놓느라 셔츠 안에 걸어둔 건 아닐까 하고 주머니를 있는대로 뒤져봤지만 비상금 같은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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