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94)
다니는 헬스장엔 스트레칭 존이 꽤 넓게 마련되어 있다. 덩치가 큰 성인 남성이 대자로 뻗어도 남을 널찍한 매트도 열을 맞추어 착착 깔려 있다. 스트레칭 존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매트에 자리를 잡은 이들 대다수는 폼롤러로 뭉친 근육을 풀어준다. 폼롤러 존이라고 이름을 바꿔도 될 듯하다. 하긴, 근육을 풀어주는 것도 스트레칭의 일환으로 볼 수 있으려나.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난 스트레칭이라는 태초의 의미(stretch, 늘이다)를 지키기 위해 폼롤러 사용은 거의 하지 않는다. 애초에 뭘 풀어 줄 근육이 없기도 하고. 말 그대로 몸을 쭉쭉 늘리며 뻣뻣하게 굳어 있는 몸을 풀어주고 본격적인 운동 전 예열을 하는 쉽게 그려지는 스트레칭을 할 뿐이다.
파리에 살 때 다니던 피트니스 센터의 회원권은 모든 G.X 프로그램 수강이 포함되어 있었다. 비싼 돈을 내고 끊었으니 뽕을 빼겠답시고 이것저것 들어보다가 꽂힌 프로그램이 있었다. 바로 매주 수요일 저녁의 스트레칭 세션. 회원권이 만료될 때까지 빼먹지 않고 들었다. 선 채로 다리를 굽히지 않고 땅을 짚어 보는 동작을 할 때면 아래 보이는 땅이 그렇게 멀 수가 없었다. 유연성이 제로였기에(앞서 소심한 근육량을 밝혀놓고 유연성도 없음을 밝힌다) 손끝이 땅에 닿을 리 만무했고, 뻣뻣한 내 몸이 아닌 땅이 너무 아래에 있다며 애꿎은 땅 탓을 했다. 그런데!
파리에서 스트레칭 수업을 꾸준히 듣고 난 후로 거뜬히 땅을 짚을 수 있는 몸뚱이가 된 게 아닌가! 게다가 그해 건강검진을 하니 키가 1.5cm가량 자라는(당연히 실제 키가 자란 건 아니다. 자세가 교정됐을 뿐이다) 기적이 일어났다. 그래서인지 남들 다 쓰는 폼롤러엔 눈길도 주지 않고 스트레칭에 매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저께, 다른 날과 똑같이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스트레칭 세션 때 자주 반복하던 루틴을 기억나는 대로 수행하는데, 중간 즈음부터는 매트에 등을 대고 하는 스트레칭을 한다. 오른쪽 무릎을 잡고 배 쪽으로 끌어당긴다. 그 자세에서 접힌 무릎이 ㄱ자가 되도록 멀리 보내며 상체를 비튼다. 이때 왼손이 오른 다리를 당기고 오른팔은 반대 방향으로 쭉 뻗는다. 고개 역시 멀리 보낸 무릎의 반대방향으로 둔다.
오른쪽만 할 수는 없으니 똑같이 왼쪽도 같은 스트레칭을 한다. 다리를 먼저 오른쪽으로 보내고 고개는 반대 방향인 왼쪽으로 돌렸다. 그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장르가 범죄 스릴러라면 으스스한 배경음이 깔릴 테도, 로맨스라면 샤랄라한 배경음이 깔리겠지만 마주친 두 눈 사이를 헤집고 들어오는 건 침묵을 동반한 어색함이다. (물론 헬스장엔 빵빵하게 빠른 RPM의 음악은 흐르고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남자를, 친교적 자기소개랄까 비즈니스적 통성명이랄까를 할 찰나도 없이 곧장 아이컨텍트부터 해버렸을 때의 어색함이란...
옆 매트에서 스트레칭을 하던 남자는 공교롭게 내가 하는 것과 똑같은 동작으로 몸을 풀던 중이었다. 내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 그도 왼쪽으로, 그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 나도 오른쪽으로 시선을 보냈다면 갑작스럽고도 어색한 이런 눈 맞춤은 없었을 텐데... 내가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틀었을 때 하필 그도 휙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것이다. 폼롤러로 근육을 풀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가고, 어색한 순간이 찾아올 운명이었는지 나처럼 스트레칭하는 사람이 옆자리로 온 모양이다. 나도 그도 얼떨결에 한 스트레칭 중의 눈맞춤이 민망해서 서둘러 고개를 정면으로 다시 돌렸다.
그날 이후, 옆 매트를 누군가 선점하고 있으면 옆사람과 상하 반전되게 몸을 뉘였다. 그러니까 옆사람이 머리를 벽 쪽에 두고 누워 있으면 난 복도 쪽으로 머리를 두는 식으로. 근데 고개를 돌렸을 때 옆사람 발을 마주하는 것보다 어색하더라도 얼굴을 마주하는 게 더 낫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