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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딜리버 리 May 12. 2024

고래는 새우깡을 먹는다

엘베 없는 5층 아파트의 401호에서 새우깡 20박스를 시켰다. 평수가 큰 아파트가 아니라 고래 키우기 힘들겠지만 세상엔 생각도 못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코끼리도 냉장고에 넣는데!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더니 새우깡 대량 주문에 택배족 무릎 터지겠다. 3번째 오르는데 무릎이 푹 꺾인다. 5번 오르내리며 문 양쪽으로 박스 쌓고 돌아서는데 문이 덜컥 열리고,

-(문 양쪽에 장승처럼 선 새우깡 박스를 보더니) 어~ 1개만 시켰는데…

-1박스요? 주문 수량이 20박스 맞는데요

-아닌데

-(배송어플 보여주며) 주문 수량 맞습니다

-이상하네

-(반품하겠다, 가져가라 이런 말 할까 봐, 서둘러) 안녕히 계세요


100% 반납이고 19박스를 다시 내려야 한다. 아~ 싫다! 고갱님, 아무리 무료 반품이어도 주문내역 확인하고 결제합시다, 쫌! 같은 조 단톡방에 반품 들어올 거라 했더니 다들 울상 또는 화난 이모티콘.


어제 배송한 새우깡 20박스가 아침부터 화제다. 혹시라도 내가 그 구역을 갈 불안과 나만 아니면 나름 괜찮은 재미가 공존 중이다. 다들 살짝 상기된 채 어떻게 하면 좀 더 편하게 내릴 수 있는지 농담반 진담반으로 아이디어를 쏟아낸다. 과자라서 질소포장에 무겁지 않으니 창밖으로 던진다, 테이프로 묶어서 한 번에 들고 온다, 19박스를 다 먹는다, 몇 개는 들고 몇 개는 계단에 굴린다 등등.


그러거나 말거나 다른 지역으로 배송 지원 가는 나는 룰루랄라~ 이런저런 방법을 재미나게 떠들던 동료가 당첨되었다. 그러게 말이 씨가 된다잖아. 복귀해서 그 구역을 간 동료에게,

-반품 받아왔나?

-언지예

-와?

-반품 접수 안했던데예

-진짜로?

-예

-햐~ 그 양반 택배족이랑 밀당하나?

-바로 위층 배송 갔다가 401호 앞에 쌓인 새우깡 박스 보이 진짜 답답하데예

-허~ 그럼 내일도 오늘처럼 쪼아야 되나?

-우쨌든 행님 손에서 벌어진 일인데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ㅎㅎ

-택도 아인 소리! 올린 거로 충분하다


오늘 하루만 보고 사는 택배족인데 졸지에 내일을 신경써야 하다니, 월급에 비해 가혹한 업무 스트레스다. 3일 연속 반품 접수 안 하기에 정말 다 먹었나? 진짜 고래를 키우나? 농담을 주고받았는데, 4일 차에 반품 접수되었다. 반품 받아온 동료는 월남 스키부대처럼 무용담을 쭉 늘어놓는다.


그나저나 고갱님은 정말 고래를 키워볼까 고민하다가 도저히 안될거 같아서 4일 차에 반품 접수한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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