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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대니보이
Mar 12. 2022
김창열미술관, 물방울 그리고 와인
바람 소리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초봄이라고 하기엔 쌀쌀한 기운이 압도적이라 차라리 초겨울이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제주 날씨, 그래 제주는 바람이 많다고 했지.
옆길 화단의 로즈마리 잎새를 비볐더니 손에 묻어난 진한 허브 내음에 마음 한편에 온기가 올라왔다.
어슷하게 쌓은 다섯 개의 정방형 조각 위에 자리 잡은 반구형의 구조물이 서낭당처럼 서 있었다.
그 곁을 지나 문을 열고 공간으로 들어섰다.
마대 자루에 영롱한 물방울 하나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물방울_부분
작년 일 월에 세상을 떠나셨고 그 다음 달 열린 경매에서 1977년 그의 작품이
십 억을 넘어선 가격에 낙찰되었다.
우스갯소리로 작가가 죽으면 그림값이 올라가니 소장자들이 말 그대로 웃는다는데
돌아가시자마자 그 가격이 두 배도 뛴 것이었다.
1972년 그의 첫 물방울 작품 ‘ 밤에 일어난 일’ 앞에 서서 그가 밤에 보았던 일을 그려 보았다.
밤에일어난 일 1972
배고픈 작가가 캔버스를 재활용하기 위하여 물을 뿌려 놓았다가 우연히 발견한 물방울.
그 물방울을 거친 마대 자루에 하나하나 채워가기 시작했다.
거친 질감에 대비 되는 영롱한 물방울은 그림 좀 안다는 이들의 워너비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의 물방울을 보면서 나는 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일까?
좋다? 마음 편하다? 뭔가 충만한 기운이 느껴진다?
생전 인터뷰에서 작가는 "물방울을 그리는 행위는 모든 것을 물방울 속에 용해시키고 투명하게 무(無)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라고 얘기하였고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든 것을 허(虛)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가 곧 물방울 작업" 이라고도 하였다.
미술관의 영상에서 학자 한 분은 실재 實在와 부재 不在를 의미하는 것이 물방울이라고 설명하였다.
존재하는 것이기도 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도 한 물방울.
찰나의 순간만 존재하는 물방울을 작가는 화폭에 박제해 놓고 무엇을 보고 싶었을까?
75분의 1초 정도 되는 찰나의 순간에 모든 것이 생멸한다고 설파한
심오한 교리를 얘기하고 싶었었던 것일까?
아니면 본질에 앞서는 실존의 의미를 남겨둔 것이었을까?
무엇이 되었던 물방울 하나에 숨겨 놓아야 될 철학까지 담아 가며 그리진 않았을 텐데
답을 알 수도, 할 수도 없는 화두가 묻어 있는 대가의 그림 앞에서 한참이나 서 있었다.
세찬 바람길을 뚫고 걸어가면서 하늘을 보았더니 굵은 물기 하나가 톡, 하고 얼굴에 떨어져
손등으로 가볍게 밀어내다 집에 있는 와인 한 병이 생각났다.
프랑스 남부 론 지방 유명한 와인의 라벨로 장식된 작가의 1974년 물방울이 생각난 것이다.
맞다, 그 와인 한 잔 마시면 의미를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작은 물방울 하나가 머릿속에서 쌉싸름한 탄닌향을 흩뿌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와인병과 함께한 그의 물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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