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_떨어진 꽃잎에 옛일이 스치는 건

3부_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내일이 되길

by 대니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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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가 창문을 때린다. 멍하니 빗줄기를 보고 있자니, 표현하기 힘든 서늘함이 심장을 스쳤다. 창문 틈으로 스며든 찬바람 때문일까. 휑한 기분에 고개를 돌리니, 창가에 놓인 난초 화분이 보였다. 언제 피었는지도 몰랐던 연노랑 꽃잎 몇 개가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아뿔싸. 그마저도 두어 송이는 이미 바닥에 몸을 누인 채였다.

‘난꽃은 아무나 피울 수 있는 꽃이 아니라던데….’

나는 그 꽃이 피고 지는 것조차 무심히 지나쳤다. 떨궈진 꽃잎을 가만히 손에 쥐었다. 한 생이 온 힘을 다해 피었다가 조용히 졌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였다. 결국엔 버려야 할 작은 생명인데도, 무슨 까닭인지 쉬이 손이 가지 않았다. 그 연노랑 꽃잎을 보고 있자니, 아주 오래전 라디오에 띄워 보냈던 색종이 나뭇잎 하나가 떠올랐다.

팝송에 갓 눈을 떴던 중학교 3학년 무렵, 나는 시내 레코드 가게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환상적인 세계는 라디오 안에 있었다. 이종환, 김기덕, 황인용. 당대 최고의 DJ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해박한 지식과 매혹적인 노래들은 십 대 소년의 밤을 온통 사로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전설로만 듣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듣기로 결심했다. 밤 열 시 정각, 이불을 뒤집어쓴 채 숨죽여 다이얼을 맞췄다. 익숙한 시그널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웬걸. 서울 표준어가 아닌 구수한 경상도 억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산 MBC에서 자체 제작한 프로그램이었다.

‘아, 지방 사는 설움이란….’

처음 며칠은 부정하고 분노했다. 하지만 라디오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적응하는 것이 사람이라고 했던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분노 대신 설렘을 안고 밤 열 시를 기다렸다. 그렇게 이불 속 작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마산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나의 수많은 밤들이 깊어갔다.

라디오와 사랑에 빠져 지내던 어느 날, 문득 신청곡을 보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30원짜리 관제엽서에 글만 덜렁 써서 보낼 수는 없었다. 나는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를 떠올리며, 색종이를 오려 정성껏 나뭇잎 하나를 만들었다. 스러져가는 존시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늙은 화가 베어먼이 목숨과 맞바꿔 그려 넣었던 바로 그 잎사귀처럼, 내 엽서가 디제이의 눈에 띄기를 바랐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그날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내 별명을 불렀다.

“‘흑기사 로망’님의 사연입니다….”

어떤 노래가 흘러나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터져 나오는 숨을 죽이며 그 음악을 들었을 것이다. 색종이를 오려 붙인 서툰 나뭇잎 하나가,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찬란한 기억이 된 순간이었다.

선반 위 흩뿌려진 난꽃을 보니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송국에 보냈던 색종이 나뭇잎이 생각났다. 소설 속 노화가는 자기의 죽음을 직감하고 의미 있는 하나 남기기 위해 꺼져 가는 마지막 불꽃을 태웠을 것이다. 선반에 분분히 떨어진 난꽃 역시 온 힘을 다해 작고 노란 꽃을 피워 냈을 것이다. 떨어진 난 꽃잎에 옛일이 스치는 건 아마도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저 너머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내 나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디오 방송국에 색종이 나뭇잎을 보내던 그 시절 읽었던 ‘마지막 잎새’가 기억 난 건 밤새 담쟁이잎을 그려낸 화가처럼, 나의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손 내밀 나이가 되었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던 바로 그날, 나는 우연처럼 오래된 신문 기사 한 대목과 마주했다. 1950년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평생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헌신한 김계한 선생님과 그의 아들이자 뇌전증 환자들의 곁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나의 스승 김흥동 교수님의 이야기였다.

절망 속에 있는 이들에게 기꺼이 ‘떨어지지 않는 잎새’가 되어준 두 분의 삶 앞에서, 떨어진 잎새를 다시 돌아본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비뚤비뚤할지언정 결코 흔들리지 않는 잎새 하나를 그려 보일 수 있는 그런 삶이 되기를.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 「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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