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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끝없는대화 Jan 23. 2022

임시선별검사소에서 본 사람들

아이들

 퇴사 후 작년 9월부터 12월까지 약 10주간 시청의 공공근로로 임시선별검사소에서 일했다. 9시부터 5시까지 주 5일, 직장인처럼 출퇴근하며 주로 검진객들 안내와 인솔을 (잡일을) 했다. 초반 9월에는 후덥지근한 방역복에 놀랐고, 10월에는 많은 사람들에 지쳐 화가 났으며, 후반에는 계약기간 만료만을 바라며 추위와 싸웠다. 10주간 일하고 나에게 남은 것은 5개월간의 예정된 실업급여와 사람 경험이다.


 나는 사람이 싫다. 극소수의 <내 사람들>은 좋아하지만, 그마저도 오래 만나는 것도 피곤하다. 외로우면 친구들에게 연락해 약속을 잡지만 지칠 때면 무조건 혼자가 최고다.

 말을 하는 것도 싫다.  영어 스피킹 어플에 11만 원을 결제해놓고 5일 만에 깨달았다. 아, 나는 한국말도 하기 싫어하는 사람이었지. 토커보다는 리스너에 가깝지만 굿 리스너도 아니다. (강의를 들으면 무조건 존다.)

 가장 싫어하는 것 3가지는 설득하기, 사교적인 척 하기, 서비스직!


 그런 내가 실업급여라는 목적 하에 공공근로를 신청하였고, 서비스직 비스무리한 업무를 맡게 되었다. 추석과 위드 코로나에 급증한 검진객을 상대하느라 진이 빠졌지만 여러 가지 느낀 점들이 많았다.




 1. 어르신들은 청년들의 상상 이상으로 기기 사용이 어렵다.


 수기로 작성하던 문진표는 어느 순간부터 스마트폰의 QR 스캔을 통한 전자문진표로 바뀌었다. 나도 QR을 보여준 적만 있었지 스캔해본 적은 없어서 처음에 조금 머뭇거렸는데 검사소를 방문하시는 어르신들은 30년대생까지 매우 다양했고, 60년대생 위로는 단 한 분도 도움 없이 하실 수 있는 분이 없었다. 대체 누가 전자문진표 시스템을 만든 것인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최신 폴더블 스마트폰을 가지고 계셔도 QR 스캔 방법을 모르시는 분, 스마트폰이 있어도 카카오톡이 깔려있지 않으신 분, 페이지를 어떻게 내리는지 모르시는 분, 타자를 못 치시는 분, 폴더폰 사용자에 문자메시지를 확인할 줄 모르는 분까지... 심지어 주민등록번호를 모르는 분도 있었다. 어르신들이 키오스크를 보고 그냥 돌아간다는 말이 그제야 이해가 갔다. 매일같이 수백 번을 그 간단한 개인정보 입력을 도와드리고 있다 보면 어르신들의 어려움이 백분 이해가 가면서도 가끔씩 울컥 답답함이 올라오곤 했다. 나도 나이를 먹으면 저렇게 되겠구나, 젊은이들이 이해를 못 하겠구나 두려움이 생겼다.


2. 빈부격차와 양육태도, 사회 소외계층


 검사소에는 모든 연령과 사회계층이 찾아온다. 지역 간 격차는 있겠지만 최소한 그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검사소에 방문하고, 사회계층이 확연하게 눈에 뜨인다.

 일하는 중에 나온 듯한 정장을 입고 방문하는 분들도 있고, 잠옷처럼 추레한 옷을 입고 방문한 분들도 있다. 외국인 노동자나 건설현장 종사자분들은 스마트폰의 화면이 거의 다 깨져있다. 현장에서 자주 떨어트리셔서 그런 듯했다.


 성인보다 크게 차이 나는 것은 바로 아이들이다. 정확하게는 아이들을 대하는 부모님의 태도다.


 대부분의 미취학 아동 부모님들은 아이가 도망치지 않게 붙잡고, 끝나고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는 약속을 하며 어르고 달래느라 바쁘다. 보통 둘셋씩 데리고 오기에 더욱 힘들다. 미취학 아동들의 검사를 할 때면 대개 발버둥 치고, 하기 싫다, 살려달라며 악을 쓰고 숨이 넘어간다. 이곳의 분위기와 방역복, 코에 이물질을 넣는다는 공포심이 충분히 이해가 되기에 그 울음소리에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다. (간혹 10살이 넘은 다 큰 아이들이 악을 쓰고 난리를 치기도 하는데 그 경우 부모님들이 크게 혼내지 않고 품에 어르며 돌아간다. 아이의 성격이 원래 그런 것인지, 부모님이 동행하여 그런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한 아이를 데리고 온 어머니가 있었는데, 아이가 무서워하자 시간을 충분히 들여서 검사소를 빙 둘러보고 왜 검사를 해야 하는지, 저분들이 무엇을 하시는지, 앞으로 할 검사를 어떻게 하는 건지를 납득시키고, 무섭지 않게 달래주었다. 결국 아이는 눈물만 조금 흘리고 조용히 검사를 끝내고 집에 돌아갔다.


 다른 날, 두 아이를 데리고 온 어머니가 방문했다. 한 아이가 잠시 눈앞에서 사라지자, 그 어머니는 사람들 앞에서 아이를 불렀다. 씨발 (ㅇㅇㅇ) 어딨어!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는데, 정말 자기 아들을 그렇게 부르며 찾은 것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돌아온 아이를 의자에 앉히며 머리를 쥐어박았다.


 겉모습으로만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전자의 어머니와 아이는 단정하게 차려입었고, 후자의 어머니와 아이들은 그리 경제적으로 풍족해 보이지 않았다. 단편적으로 기억나는 두 가족만 예시를 들었지만 10주간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님들을 굉장히 많이 본 결과, 경제적으로 풍족해 보이는 부모님들은 아버지가 아이들을 더 많이 신경 써주고 검사에 대한 충분한 설명, 차분한 대화로 달래주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반대로 경제적으로 어려워 보이는 부모님들은 강압적인 언사를 행사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아버지가 동행하지 않거나 아이들을 신경 쓰지 않고 타인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상상 이상으로 아이들을 막 다루는 부모들이 많았다. 과거 가정교육의 빈부격차를 선입견과 편견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목격하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가장 생각이 많았던 날은 복지관에서 지적발달장애 청소년들을 수십 명 데리고 와서 검사를 했을 때였다. 길거리를 지날 때엔 한 명도 보지 못했는데, 어디서 그렇게 숨을 쉬고 말을 하고 걷고 뛰며 살아가고 있던 것인지. 장사처럼 큰 남학생도 5살 어린아이 같아서, 단 한 명도 한 시도 가만히 두기 어려워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한두 명씩 양손에 붙잡아놓고 어르고 달래며 줄을 세우고 검사를 받게 했다. 검사대기공간은 시끄럽고 왁자지껄했지만 선생님들은 최선을 다해 통제하고 있었다. 단 한 분도 화를 내거나 얼굴을 찡그리는 분이 없었다. 나는 어르신들이 스마트폰을 못 다루신다고 화를 삭이고 있었는데, 이 분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인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도 우리처럼 혼자 살 수 없는데, 어디로 갈는지, 온전히 평생을 부모님과 살런지, 영원히 자라지 않는 커다란 5살 아이들을 하루 종일 돌보는 복지시설 선생님들은 누가 돌봐줄는지...... 마스크 밑으로 눈물이 조금 흘렀다.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접하며 힘들기도 했지만 깨달은 것이 많았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살고 있었다. 나는 실업자인 현재도 아동 후원을 정기적으로 하고 있다. 한 아이와 결연을 맺고 그 아이의 얼굴과 나이를 알고 교육비로 매달 사용된다는 것을 아는 이상 책임감이 막중하다. 내 한몫 밥벌이도 불안한데 누굴 책임지나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보육원에서 자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단 하나의 죄도 없기 때문에 후원을 계속한다. 올해 내가 내는 교육비로 한 여학생이 조금은 똑똑해지고, 성취감의 기쁨을 맛보았으면 바랄 것이 없겠다. 나도 어릴 땐 머리를 꽤나 맞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무려 2022년인데, 머리를 쥐어박히는 아이가 한 명도 없었으면 좋겠다.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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