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임
나는 잠시 ‘Polyglot(다중언어 사용자)’을 꿈꿨었다. 유럽에서 유학하던 때라 언어 자극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르미날>, <설국>등을 원서로 읽어내고픈 맘이 오래전부터 컸다. 프랑스어, 일본어를 매일 조금씩 배웠지만, 전공 과제와 세미나 준비로 포기해야 할 때가 많았다. 그래도 게으른 탓이 가장 크다. 미국 도서관에서 일할 때, 영어권 책 다음으로 중국어권 책이 많았기 때문에 중국어를 배워서 수많은 책을 능숙하게 정리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중국인 튜터에게 나름 고액 과외로 일주일에 두 시간씩 1년을 배웠다. 지금 기억나는 중국어는 고작 몇 문장 안된다. “나도 껴줄래?”,”공이 선에 걸렸어”,”지금 포인트는 몇이니?” 그리고 “좋은 게임이었어”. 모두 매주 화요일, 목요일마다 참석했던 배드민턴 클럽에서 써먹던 문장들이다.(당시 클럽의 90퍼센트가 중국인들이었다) 지난 나의 인스타 글들을 보면 오타부터 엉망진창 띄어쓰기까지 심각하다. 모국어부터 다듬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렇게 나는 모국어도 엉망이고 ‘Polyglot‘의 꿈도 포기했던 게 옳았던 듯싶었다.
얼마 전에 남편이 유튜브에서 피아노 조율사 인터뷰를 봤다며, 조율사가 쓴 책을 링크로 보내줬다. 마침 피아노 조율과 관련된 책을 읽고 있던 터라 바로 주문해서 읽었다. 이종열의 <조율의 시간>. 1938년생인 저자가 피아노 조율에 입문하는 과정에 여러 번 놀랬다. 조율이라는 단어도 모르던 저자가 교회 풍금에 반해서 손가락 번호를 외워서 연주를 독학한다. 이어 소리 연구를 위해 물리학 책을 찾아보고, 일본어로 쓰인 조율법 책을 읽기 위해 일본어를 독학하고 조율법마저도 독학으로 흡수해나간다. 그게 저자가 소학교 그리고 중학교 때 일이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피아니스트들의 피아노를 조율하던 일화들은 믿기지 않을 만큼 섬세하고 예민하고 화려하고 또 정직하다. 연주회가 주말에도 있으니 365일 거의 쉬는 날이 없다. 1호 피아노 조율 명장인 저자는 아직도 아침마다 음반을 들으며 어떻게 완벽한 소리를 만들 수 있을지 연구한다.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한 연구와 노력이 저자의 명성의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장을 그리고 그 시간을 존경할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찾고 싶은 구절이 있어서 제레미 머서의 <시간이 멈춰 선 파리의 고서점>을 들춰보았다. 표시해둔 구절들만 살펴보는데, 시간만이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이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곳을 지나간 유명한 작가들의 명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점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한 서점 대표 조지와 함께 싸운 긴 시간 덕분이다. 수십 년이란 시간이 사람들의 관심을 모이게 하고 힘을 보태게 한다.
고작 몇 년, 고작 몇 개월 외국어 공부를 하면서 쌓이지 않는 실력을 탓하며 포기를 했다. 쌓이는 시간이 없으니 쌓이는 실력도 없는 게 당연하다. 그걸 이제야 또 알아간다. 다시 polyglot의 꿈을 꾸는 건 아니다. 책방도 쌓이는 시간만큼 성장해 있을 거란 희망이 생겼다. 조급함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간다. 쌓이는 시간을 믿어보려 한다. 물론, 시간과 함께 특별한 무언가도 쌓여가야겠지. 그것도 조만간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쌓여라 시간아! 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