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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로 Aug 27. 2024

그게 문제다

- '엄마'말고 '나'되기


그게 문제다


이제 막

십 대가 된 아들이

엄마 자리에 앉더니

이렇게 써 놓고 갔다.


― 나는 나다

엄마는 엄마다

근데 그게 문제다

엄마가 정말 너무 엄마라서


푸싯

어쭈구리

네가 이겼다











  초등학생 아들이 하나 있다. 혼자 돈 벌어 키우는지라 없는 살림에 학원 보내기가 빠듯해서 공부는 지금껏 엄마인 내가 봐주었다. 1학년 입학할 즈음에 공룡 카드로 겨우 한글을 뗐고, 덧셈과 뺄셈은 손가락과 바둑알의 도움을 받았다. 아이는 다행히 매 학년 초 실시하는 기초학력평가에서 아슬아슬한 점수로 학습 부진에 걸리지 않는 정도에는 도달했다. 그만큼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이와 나는 거의 매일 저녁, 전쟁 아닌 전쟁 같은 공부 시간을 가지곤 한다. 그런데 아이가 이제는 견디기 힘들었나 보다. 며칠 전이다. 아이는 더 이상 엄마랑 공부하고 싶지 않다고 선포해 버렸다. 그리고는 학원이나 공부방을 보내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면 얼마나 좋으랴. 나도 퇴근하고 오자마자 저녁 해 먹이고, 집안일하고, 쉴 틈도 없이 아이 공부까지 봐주는 극한 일정에서 벗어나고 싶기는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아이의 요구에 맞춰 동네 학원과 공부방을 알아보니 피아노나 태권도와는 달리 국·영·수 학원은 비싸도 정말 너무 비쌌다. 이렇게까지 비싼 줄 몰랐다. 게다가 내 눈에는 초등학생이 이렇게까지 공부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일정과 공부량도 굉장해 보였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친구들이 많이 다닌다며 아이도 가고 싶어하는 학원과 공부방은 가는 곳마다 무슨 유명한 학습기기와 컴퓨터 프로그램, 학습 교재를 주로, 혹은 보조로 사용한다고 했다. 학원과 공부방 선생님은 내가 보기엔 공부를 가르쳐 준다기보다는 학습기기와 교재를 사용해서 주어진 프로그램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코치에 가까웠다. 여러 저러한 이유로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가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나는 그렇게 고집스럽게 지금까지의 방식을 고수해 나갔다.


  며칠 전이었다. 아이와 공부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갈 때였다. 아이가 방으로 와서 내 컴퓨터를 켜더니 그 앞에서 타닥타닥, 뭔가를 적어 놓고 휑하니 나가버렸다. 화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나다.

     엄마는 엄마다.

     근데 그게 문제다.

     엄마가 정말 너무 엄마라서.



  어후, 요 녀석.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아듣고는 나는 푸싯, 헛웃음을 뱉고 말았다. 아이의 재치 있는 시 한 편으로 새어 나온 웃음은 며칠간 아이 공부 문제로 바짝 긴장하고 있던 내 몸과 마음을 단번에 무장해제 시켜버렸다. 그래, 미안타. 엄마가 너무 엄마라서.


  아이는 올해로 열한 살이 되었다. 아이에게는 그게 꽤 크게 의미 있었던 모양이었다. 연초부터 본인은 이제 십 대라며 십 대에 걸맞게 존중해 달라는 말을 노래처럼 수없이 하는 중이다. 아마 이런 뜻일 거다. ‘어린애 취급하지 마세요.’


  아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나도 더는 이 문제를 붙잡고 싶지 않아졌다. 우리는 이렇게 하기로 했다. 엄마는 학원 보낼 돈이 없고, 너는 학교 수업만으로는 공부를 따라가지 못하는데, 이젠 엄마 도움은 못 받겠다고 하니 그럼 학원과 공부방에서 그렇게들 좋다고 하는, 공부를 돕는 기기를 아예 집에 데려오기로.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자기주도학습이라는 명목으로 여러 학습 기기를 찾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꽤 많이들 사용하는 중이었고, 공부방이나 학원에 비하면 가격도 훨씬 저렴했다. 스스로 읽고 쓰면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클릭하면서 두루뭉수리 넘어가는, 깊이 없는 수박 겉핥기식 공부인 것 같아 무척 마음에 안 들지만, 일단은 차선책으로 이 방법을 써 보기로 했다. 혹시 또 아는가. 내 아이에게는 이게 잘 맞을지도.


  그렇게 한바탕 아이 공부 갈등을 정리하고는 혼자 조용히 아이가 썼던 글을 바라보는데 문득 몇 달 전, 아이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이 친구 중에도 우리처럼 이혼하고 엄마가 혼자 키우는 친구가 있다. 그런데 그 친구네 집이 다시 아빠랑 합쳐서 살기로 했단다. 그런데 아이 친구가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아, 우리 엄마, 븅신."


  맙소사. 처음엔 고작 4학년이 된 아이가 자기 엄마에게 그런 욕을 했다는 것에 대한 충격이 먼저 크게 왔었다. 무심한 척,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인 척하며 얘기하는 아이를 옆에 두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아무 반응도 없는 나의 침묵을 견딘 아이는 다음 말을 이었다. "걔, 아빠가 자기 엄마한테도 폭력 쓰고, 친구한테도 폭력 쓴대. 욕도 많이 한 대. 근데 다시 같이 살기로 한 거래."


  말을 토해낸 아이는 고개를 돌려서 내 얼굴을 정면으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내 응답을 바라고 있었다. 반짝이면서도 불안한 눈빛이었다. 그제야 아이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나는 아이에게 천천히,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 마. 엄마는 이제 더 이상 븅신 아냐."


  우리도 그런 적이 있다. 전남편과 다시 합쳐서 살았던. 딱 일 년이 있었다. 그 기간은 더 큰 상처와 거액의 빚으로 끝났다. 그 이후로 나와 아이는 산에 들어가 도만 닦으며 살아도 못 깨칠 깨달음을 매일 같이 온몸으로 깨달아 가며 지금껏 재가 수행을 이어가는 중이다.


  아이 친구 이야기를 나눈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븅신 아닌 엄마 되기’.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이가 나보다 수행 내공이 훨씬 더 깊었던 것 같다. 아이는 내게 ‘븅신 아닌, 너무 엄마인 엄마’가 아니라, ‘엄마’를 벗어던지고 ‘나’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게. 그 말이 맞네. 맞아도 너무 맞네. 아들아. 너가 너인 것처럼 엄마도 이젠 ‘너의 엄마’가 아니라 그냥 ‘나’가 되어가련다.


  아이가 조금만 더 천천히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너무 엄마인 엄마’로서 못 해준 게 더 많은 것 같은데. 아이는 벌써 내가 ‘엄마’를 내려놓기를 바랄 줄 아는, 온전한 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니. 엄마의 속도는 너무 느리고, 아이의 속도는 너무 빠른 것 같다. 그래, 존중해 줘야지. 자기 앞길 스스로 가겠다는 아이를 믿어줘야지. 벌써 그럴 때가 왔다니. 기분이 이상하다. 걱정과 염려, 미안함이 많았던 시절들. 다행히도 그 시절들, 잘 지나가지고 있나보다. 아이가 잘 커가고 있는 것 같아 너무 감사하고 기특하고 뿌듯하고 등등 여하튼, 가슴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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