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미 Dec 02. 2022

내일 점심, 시간 되지?

아니요. 안 돼요.



"내일 점심, 시간 되지?"


갑자기 오른쪽 어깨에 올려진 누군가의 손과 왼쪽 귀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나이 차이가 20년 가까이 나는 이로써, 평소 직장 선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동료 한 분이 서있었다. '무슨 일이세요?'라고 반문하며 '내일 점심, 시간 되지?'에 내포된 그의 의중을 추측했다. 점심시간에 이야기를 하자는 것인지, 점심때 어디를 같이 가자는 건지, 점심밥을 함께 먹자는 건지, 그 뜻이 모호하긴 했지만, 내일 나의 점심시간이 비어 있을 거라고 확신을 가지고 던진 말이거나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시간을 내라는 주문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내가 밥 한 끼 사주려고. 생각해보니 우리 과 후밴데 밥도 한 번 안 사줬지 뭐야. 그리고 할 얘기도 있고..."


순간, 불안이 엄습했다. 나는 공짜 밥을 베푸는 이의 선의를 믿지 않는 편이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 특히, 그곳이 직장이라면.'이란 말을 출근길 위에서 삼백 번쯤 읊어대는 나에게는 상당히 불안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분명, 나에게 부탁할 일이 있을 거다, 그동안 이런 식으로 어영부영 떠맡았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나, 하는 생각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래서 살며시 거절 의사를 보여 보았다. '아,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자, 옆 자리의 나이 지긋한 동료가 예의범절을 운운하기 시작했다. 선배가 후배가 예뻐서 사주는 밥은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받아먹는 것이 도리라고 떠드는 통에 분위기에 말린 것 같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와의 점심 약속을 잡았고,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춘 채 일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둠 초밥 세트 두 개를 주문하고 일상적인 이야기가 오고 갔다. 생각보다 온화한 그의 어투와 자세에 정말 후배에게 온정을 베푸려는 것이었나, 하는 고마움이 불신의 자리를 대신할 때쯤 식사가 나왔다. 초밥 두 피스 정도를 먹었을까, 갑자기 그가 목소리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흠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교직 선배이자 인생 선배가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기분 나쁘게 듣지 마."


다시금 불안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말란 말은 화자, 자신으로 비롯하여 청자의 기분이 이제부터 나빠질 것이 자명함을 전제로 깔고 내뱉는 말이 아닌가. 갑자기 퍼붓는 소나기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나는 그가 쏟아 내는 언어의 우박 덩어리를 정통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폭격은 '연구회에서 같이 일하는 땡땡이를 왜 무시하느냐? 네가 땡땡이를 무시해서 땡땡이가 선배들 앞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아느냐, 그 바람에 선배들 사이에서 네 이미지가 예전만 못하다'는 거였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나머지 나는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무시한 적은 한사코 없으며 왜 이런 오해가 생겼는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당황과 황당 사이에서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내가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바가 맞다면 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테다. '땡땡이와 네가 아무리 동기라도 나이 순으로는 언닌데, 네가 한 번도 언니 대접을 해주지 않았다고 했다. 땡땡이는 너와 잘해보려고 먼저 다가가기도 했는데 네가 그 노력들을 다 무시했다더라. 그리고 네가 국내 대회에서 입상하여 국제 컨퍼런스에 스피커로 갔다 온 이후부터 더 땡땡이한테 쌀쌀맞아졌다고 한다. 그런 행동이 나 잘났다고 으스대는 것 같이 보인다. 너무 잘난 척하면 적이 생긴다. 잘해도 못하는 척 겸손할 필요가 있다. 뒤에서 나오는 말이 많아서 내가 이렇게 총대 메고 말을 한다. 다 선배로서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 기분 나빠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생각하면, 달랑 만 원짜리 초밥 세트 앞에서 왜 이런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으며, 이미 일방의 견해로부터 나를 나쁜 자 내지는 싹수없는 자로 규정하고 하는 말에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밥알이 코로 넘어가는 듯했다. 요청한 적도 없는 인생조언을 들은 그날, 나의 모든 소화기관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충격을 받아 제 기능을 멈추었다. 잘 나가다가 브레이크가 걸린 자동차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주 성실히 연구 모임에 참여하며 더 좋은 교사가 되려 한 애초의 나일 뿐이었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내린 이 긍정적인 평가는 타인의 부정적인 말 한마디에 의해 물거품이 다.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인생의 과정에서 자가 평가보다 타자의 평이 미치는 영향력이 더 거대하다는 아이러니를 몸소 겪은 타이밍이었다. 자존감의 자리에 '나는 왜 이럴까, 왜 겸손하지 못했을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재수 없게 생각했을까'하는 자책이 들어찼다. 그런데도 뭐가 좋아서 그 연구 모임에 계속 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연구회에서 주최한 연수가 한창 진행되던 어느 날이었다. 모임에서 친하게 지내던 한 선배가 내게 다가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을 건넸다.


"요즘, 연구회에서 이미 이름이 잘 안 들리네?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 되는데, 벌써 쏙 들어갔어. 국제 컨퍼런스까지 갔다 온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땡땡이는 요즘 TV에도 나오고 잘 나가는데."


나는 이 말을 끝으로 정치판 같은 연구회에서 탈퇴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탈퇴한 나를 두고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먹튀 했다'며 역정을 냈다고 했다. 정작 나는 무엇을 받아먹었는지 잘 모르겠는데 말이다.


*

수업을 마치고 오니, 교무실의 분위기가 오늘따라 유독 화기애애했다. 원로 교사 한 분이 신규 교사 몇 명을 불러 저녁으로 닭발을 사주겠다는 인심을 쓰고 있었던 까닭이다. 문득, 그때 그 시절 대접받은 만 원짜리 모둠 초밥 세트가 떠올랐다. Z세대 후배에게 흔쾌히 닭발을 대접하려는 저 X세대 선배는 조금 다르려나, 하는 생각과 함께.

매거진의 이전글 믹스견을 위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