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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올리스트 한대규 Nov 30. 2023

큰 배의 선원이 되어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기쁨

함께 연주한 지휘자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사람을 고르라면 지체 없이 만프레드 호넥 Manfred Honeck을 얘기할 것이다. 그를 처음 만난 건 2019년,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참가했던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 Verbier Festival이었다.


알프스 산 중턱에 위치한 스위스의 작은 마을 베르비에서 열리는 이 음악페스티벌은 매년 여름 다채로운 프로그램의 음악회를 즐기기 위해 전 세계의 음악팬들이 해발 1500m에 위치한 시골마을로 기꺼이 모이는 신기한 곳이다.


나는 당시에 오케스트라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사진으로만 보던 스위스 풍경을 두 눈으로 보고 싶어 오디션을 봤다. 스위스는 유학생 주머니 사정상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닌데,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선발되면 모든 아티스트에게 오가는 교통과 7주간의 숙식을 모두 제공하기 때문에 공짜로 여행도 하고, 음악회도 보며 스위스에서  방학을 보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여느 일이 그렇듯 상상처럼 좋기만 했겠냐마는, 그해 여름이 내 음악인생에 있어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된 건 확실하다.

베르비에 페스티벌 야외 음악회

파비오 루이지 Fabio Luisi와 말러, 발레리 게르기에프 Valery Gergiev와 쇼스타코비치, 라하브 샤니 Lahav Shani와 스트라빈스키 등 세계적이고도 이름난 지휘자와 불후의 명곡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프로그램. 그 사이에서 만프레드 호넥의 지휘로 연주될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은 슈베르트 교향곡 또는 지휘자의 열혈 팬이 아닌 이상 단원들 또는 관객들로부터 큰 기대와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멍청하고 길기만 한 곡’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는 슈베르트의 9번 교향곡과 처음 들어보는(물론 내가 무지한 탓이었지만) 지휘자의 조합은, 내가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일에 매력을 느끼게 된 첫 계기가 되었다.


총 러닝타임이 60분에 육박하다 보니 지루해지기 쉬운 9번 교향곡 ‘그레이트 심포니‘ Great Symphony의 그레이트Great는 독일어 Groß의 영번역이다. 이름에 대단한 뜻이 있을 것 같지만 사실 동일한 C Major 조성으로 작곡된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교향곡인 6번과 구분하기 위해 슈베르트가 칭한 이름일 뿐이었다.(동명이인의 친구가 있으면 '작은 철수', '큰 철수'라고 부르듯이). 그러나 슈베르트가 이곡을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의 초연을 보고 난 뒤 그 곡을 겨냥(?)하고 썼다는 일화가 있고, 긴 러닝타임, 큰 편성, 그리고 곡에서 풍기는 웅장한 분위기와 명교향곡을 향한 슈베르트의 오랜 포부를 떠올려보았을 때 'Great'라는 제목은 곡과 썩 잘 어울린다.

Manfred Honeck © Felix Broede

만프레드 호넥은 이 곡에 대해 설명하면서 'Tänzerlich'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탠쩌리히. '춤을 추게 만드는'으로 번역할 수 있는 이 독일어 단어처럼 내가 만프레드 호넥의 지휘에 매료되었던 것은 화려한 언변이나 탄탄한 음악적 논리, 혹은 압도하는 카리스마라기 보단 그의 춤사위 탓이었다. 그는 춤을 참 잘 추는 지휘자였다. 작은 동작으로도 시선을 사로잡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런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안 그래도 반복이 많아 자칫 잘못하면 지루해지기 쉬운 슈베르트의 음악적 특성에 포부까지 더해져 길고 무거워진 음악을 리허설하는데 한 순간도 지겹지 않았던 것은 그의 무브먼트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다.  


독일어에는 쉬붕Schwung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우리말로는 쉽게 번역이 되지 않는다. 힘찬 뉘앙스를 지닌 곡선 동작, 스윙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지만 음악적인 설명에서 쉬붕은 동력, 에너지, 기운에 더 가깝다.(독일에서 음악 레슨을 청강하면 자주 듣게 되는 단어이다.) 그는 몸으로 쉬붕을 전달할 줄 알았는데 자신만 신나서 몸을 흔드는 게 아니라 함께하는 연주자 모두를 춤추게 했다.


현악기 연주자는 활로,

관악기 연주자는 숨으로,

타악기 연주자는 팔로 춤추게 했다.

손에 손 잡고 강강술래를 추듯 소리로 연결된 오케스트라가 덩실덩실 일렁였다.


학부시절 지휘법 수업에서 지휘는 파동을 전염시키는 일이라는 가르침을 받은 기억이 있다. 만프레드 호넥의 지휘 아래 연주를 하며 그게 어떤 뜻인지 체감할 수 있었다. 그의 확신에 찬 몸동작과 섬세한 율동에 동화된 연주자들은 그의 손짓 하나에도 영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도록, 그야말로 전염되어 있었다.


마치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서 모두 함께 춤추는 듯한 느낌은 오케스트라의 일원이 되어 연주하는 일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그때 그 기쁨을 처음으로 맛보았다. 커다란 배의 선원이 되어 캡틴의 지휘 아래 각자가 맡은 역할을 춤추듯 해낼 때 배가 바람을 타고 순항하는 느낌이랄까.


앞서 오케스트라에 큰 관심이 없었다고 표현했지만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싫어했다. 스위스의 목가적인 풍경과 상쾌한 공기는 좋았지만 매일 오케스트라 연습에 가는 건 고역이었다. 오케스트라 안에서 연주하는 건 그저 큰 기계의 부품이 되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거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그러나 만프레드 호넥과의 연주를 마치고 나의 생각은 달라졌다. 큰 배 위에서 함께하는 기쁨을 알게 된 것이다.


나의 첫 직장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2019년 스위스에서의 경험은 음악가로 걸어가는 내게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오케스트라라면 질색하던 내가 스스로 교향곡을 찾아 듣게 되었고, 프로 오케스트라 오디션에 지원했다. 그 덕에 게반트하우스, 도이치오퍼라는 두 개의 오케스트라에서 일을 할 수 있었고 나는 그곳에서 오케스트라에서 일하는 기쁨을 만끽했고, 사회 속에서 오케스트라가 가지고 있는 역할과 의미에 대해서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는 소중한 경험들을 했다.


점점 개인화되어가고 있고, 원한다면 온라인 속 관계만으로도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지만 오케스트라는 여전히 살을 부대끼며 시끌벅쩍하게 소통해야 하는 곳이다. 여러 가지 문제 속에서 아름다움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어쨌든 함께 손잡고 나아가는 인간적인 조직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 규모에 상관없이 학생 오케스트라가 많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어린 학생들에게 오케스트라 경험은 공동체에 대한 감각, 단체생활에 대한 지혜를 몸소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큰 소리 속에 안겨있는 안정감. 팀의 일원으로서 나 혼자서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커다란 배를 함께 이끌어나가고 있다는 느낌. 서로 다른 섬세한 소리들이 맞아떨어질 때의 기쁨. 그리고 때로는 골치 아프고 답답할지라도 연대하여 함께할 때 더 큰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지혜.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나의 작고 사소한 일을 충실히 해낼 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 지금은 내게 너무나 소중한 가치인 이 모든 것들은 교향곡이 아니었다면 얻기 힘들었을 것들이다. 당케 마에스트로 호넥, 당케 슈베르트.


기대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이름도 모르던 누군가가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내겐 2019년의 스위스, 만프레드 호넥 그리고 슈베르트의 교향곡이 그랬다.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기쁨에 대해 일깨워주었고 음악과 삶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했다. 누군가의 삶에 우연히 도달한 나의 글도 새로운 음악을 발견하는 기쁨을 선사한다면 좋겠다. 음악은 그게 누구든 새로운 곳으로 이끌어주니까.


Schubert Symphony No.9 by Mnfred Honeck, hr Sinfonie Orche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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