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궁금하지 않다고요?

읽으면서 쓰기

by 라문숙


얼마 전 옷장을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입었을 때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 옷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옷을 꺼내 하나씩 입어보았다. 과연 입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오랫동안 그 옷들은 입을 수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와 관계없이 그저 옷장에 걸려 있는 게 전부였다. 옷을 입고 벗느라 땀은 좀 뺐지만 그 일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걸려 있는 상태에서 아직 입을 만한 것들로 여겨졌던 옷들은 내가 입자마자 못 입을 옷이 되어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발등을 덮는 길이의 하늘하늘한 롱스커트, 허리 부분이 잘록하게 들어간 재킷, 색색의 구슬과 털실로 수를 놓은 가디건, 레이스 칼라가 달린 셔츠, 수가 놓인 데님 등이 있었다. 작거나(살이 쪄서), 크거나(키가 줄어들어서), 어울리지 않거나(나이 들어서), 우습거나(유행이 지나서) 한 그 옷들 사이에서 내가 입을 만한 옷은 없었다.


그것들을 입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그 옷들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옷에 특별한 추억이 깃들어 있다거나 (아이 옷이라면 혹시 몰랐다),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고가의 옷들도(남편의 옷 중 일부가 해당된다) 물론 아니었다. 언젠가 숨겨둔 옷들을 입고 선녀처럼 날아가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서로 어울리지도 않는, 그야말로 맥락이 없는 옷들이 옷장 속에 기약 없이 걸려 있었던 거였다. 옷걸이를 벗겨 바닥에 쌓았다. 훨씬 널널해진 옷장 속을 들여다보니 허전했다. 왜 서운할까, 연인에게 바람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대로인데 옷들이 나를 배반한 것 같은 느낌. 모스그린 색의 원피스 안에 주저앉아서 나는 내게 그동안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짧은 소설 《모스크바의 오해》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쉰 살 때 니콜은 자신의 몸치장이 지나치게 우중충하거나 지나치게 발랄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에게 허락된 것이 무엇인지, 금지된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고, 적절하게 옷을 입었다. 그러나 몸치장의 기쁨 또한 사라졌다. 예전에 옷에 품었던 친근한 애정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시몬 드 보부아르, 《모스크바의 오해》, p.24

니콜은 나이 예순의 은퇴한 교사다. 니콜의 엄마는 니콜이 부자와 결혼하기를 바랐지만 니콜은 진주와 모피에 휩싸이는 대신에 주목받는 논문을 쓰고 소르본의 정교수가 되어 여자의 두뇌가 남자의 두뇌만큼 뛰어나다는 걸 증명할 작정이었다. 그녀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여성 운동에 투신했지만 아무것도 이루어내지는 못했다. 결국 다른 여자들처럼, 남편에게, 아들에게, 가정에 잠식당했다. 그리고 예순이 된 지금, 남편과 함께 러시아에 왔다. 남편과 그의 전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마흔 살의 마샤를 만나 갑자기 자기가 늙고 쓸모없는 존재가 된 사실을 알아차린 참이었다.


‘나에게 뭔가 계획이 있다면, 다시 일을 시작한다면!’ 니콜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더 일찍 착수했어야 했다. 그건 그녀의 실수였다. 아니, 그녀의 실수만은 아니었다. 앙드레가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앙드레는 은밀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압력을 가했다. “당신은 충분히 일했어. 그러니까 그 복사본들은 그만 놔두고, 와서 잠이나 자. 침대 안에 좀 더 있으라고. 산책 좀 해. 영화관에 데려가 줄게.” 심지어 그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니콜의 뜻을 모두 억눌러버렸다.
시몬 드 보부아르, 《모스크바의 오해》, p.90


앙드레는 은퇴한 대학교수지만 여전히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 역시 그들을 돕고자 활발히 움직였으며, 하고 싶은 일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니까 그는 아직 현역인 셈이었다. 그러나 니콜은 달랐다. 그녀는 은퇴했으니 시간이 많았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느라 그동안 하지 못했던 미뤄둔 일들을 할 수 있었다. 니콜 스스로 자신에겐 시간이 많다고, 얼마나 행운이냐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착각이었다.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할 일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건 행운이 아니며, 여가 시간의 과잉은 사람을 빈곤하게 만들 뿐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앙드레는 니콜이 젊은 시절에 품었던 야망을 모두 포기하는 동안 그 사실을 이해할 시도 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를 위한답시고 그녀를 일에서 떼어 놓기만 했던 것이다. 은퇴한 니콜에게는 앙드레 외에는 남은 게 없었다.




그렇다면 은퇴할 직장도 없는 난 평생 니콜처럼 살아온 것일까? 장만한 시기가 각기 다른 옷들이 그 시기의 나처럼 느껴졌다. 그때 내가 저랬구나, 저런 옷을 입고 싶었던 때가 있었구나, 더 이상 입을 수 없는 옷들에 둘러싸여 깨달은 것은 나를 배반한 것이 옷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언젠가’란 단어를 앞세워 유예한 것들은 옷장 속, 더 이상 입지 않는 옷들 사이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하나둘 씩 사라졌다. 그 자리에 있으라고, 언젠가 찾으러 올 거라고 뒤돌아선 후 나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나중에 먹으려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가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발견한 아이처럼 혼란스러웠다. 나이듦은 옷에 품었던 애정뿐만 아니라 이루고 싶었던 어떤 것들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포기하게도 한다.


니콜과 앙드레는 싸운다. 그리고 화해한다. 이 짧은 소설은 그 싸움이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계속 함께 살 것이고,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불만을 감출 것이다. 많은 부부가 그렇게 포기하고 타협하면서 근근이 살아가는 것처럼 니콜도 앙드레 곁에서 혼자 고독해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납득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한 가지 오해에서 다른 오해로 건너뛰면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싸운 다음날도 남편은 출근을 했다.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그는 사무실이 있고, 책상이 있고, 동료가 있었다. 남편이 누군가와 함께 할 일이 있는 하루를 사는 동안, 나는 집 안에 홀로 남았다. 남편의 뒤에서 소리 내어 닫혔던 문을 열고 마트에 다녀왔고, 식어버린 음식을 데워 먹었고, 설거지를 했다. 저녁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퇴근을 했지만 나는 종일 상대도 없는 싸움을 되풀이하느라 만신창이가 되어 있곤 했다. 어째서 우리의 하루가 이렇게 다른가를 궁금해하지 않으려 애썼다.

가장 좋은 처방은 책을 읽거나 바느질을 하는 거였다. 이야기 속을 헤매는 일은 상처 받은 자신을 잊는 한 방법이었으며, 촘촘하게 바늘땀을 이어가는 것은 널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가끔 일기도 썼다. 글로 쓰인 상황은 때로 자신이 얼마나 성급하고 어리석었는지, 우리가 얼마나 하찮은 일로 다퉜는지 가감 없이 보여줬다. 그러나, 그보다 종종 쓰기는 억울함과 서운함과 분노를 키웠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감정을 정확한 언어로 바꾸어 쓰는 일의 중요함을 실감할수록 나는 참게 되었다. 표현되지 않은, 미숙한, 부정확한 감정들이 이름을 갖게 되는 순간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것을, 그것으로 받은 상처는 회복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였다. 결국 나도 니콜처럼 포기하고 타협하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렇게 나는 잘 참는 사람이 되었다. 목까지 올라오는 말 들을 삼키느라 종종 편도가 부어오를 정도로. 나오지 못한 말들은 여전히 내 안에서 숨 죽이며 지낸다는 걸 잊을 수 없는 만큼 들을 줄도 알게 되었다. 말해지지 않은 말들과 잘못 나온 말들 너머에서 망설이고 있는 말들을.


니콜은 파리로 돌아가면 무얼 할 수 있을까? 남아도는 시간 동안, 읽지 않아도 되는, 아니 읽고 싶지 않은 책들을 읽으며 넘쳐나는 시간을 없애버리면서 점점 더 가난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불만을 감추지 말고, 포기하지도 말고, 타협하지도 않기를 바란다. 부부는 마주 보면서도 종종 고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너무 외롭지 않기를.


페이지마다 나의 모습이 보여 책장 넘기기가 쉽지 않았던 이 작품에서 가장 슬픈 문장은 바로 이것이다.


“니콜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진심으로 염려하지 않았다.”


우리가 끝까지 피해야만 할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