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언제나 가까이 있었다. 서점에도 자주 다녔다. 그러나 읽기를 좋아하는 것일 뿐, 읽기 너머는 궁금하지 않았다. 이야기 속으로 가뿐하게 들어갔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들어갔다가 다시 튕겨 나오는 것, 내 하루는 오랫동안 그랬다. 책장 앞에 선 채로 손에 잡히는 책을 몇 페이지씩 읽고 다시 꽂아두는 버릇은 그때부터 생겼을 것이다. 책을 덮는 순간 바로 눈앞으로 달려드는 일상도 역시 내 자리였다.
차츰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생겼다. 그중 하나가 유난했다. 한 소녀가 비 오는 날 창가에 서서 뭔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아이가 바라보는 것은 그러나 비가 내리는 바깥 풍경이 아니라 유리창에 부딪혔다가 아래로 미끄러지는 빗방울들의 움직임이었다. 동그랗고 작은 빗방울들이 모여 점점 커지다가 더 이상 무게를 지탱하기 어려우면 아래로 떨어져 버리는 장면이었다. 어떤 책인지, 소녀가 창가에 서 있던 전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잊었으나 빗방울이 유리창을 따라 미끄러져 내리는 장면은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생생했다. 불이 켜진 창문 하나가 어두운 밤하늘에 떠있는 듯 맥락도 없는 그 장면이 시도 때도 없이 돌아와서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내가 유리창에 붙어있는 빗방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버티다가 이윽고 떨어져 버리고 마는. 그 장면이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또 하나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누구의 어느 작품인지 궁금했지만 확인하지 못한 채로 몇 년이 지났다. 그 책이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이고 소녀는 엄마가 임종을 맞이하는 동안 방 밖에서 비가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던 델리아였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문장들을 다시 읽는 순간 그게 내 읽기의 원체험이었다는 걸 알았다. 작은 빗방울이 매번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동안 아이는 자랐고 살림이 제법 손에 익었다.
책이 한층 다가오는 걸 느꼈다. 종종 약속이 있다는 것도, 빨래가 밀렸다는 것도, 식사 준비를 하려면 제때 부엌에 나가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내가 '다른 세계에 출입하는 것'을 즐긴다는 걸 알게 됐다. 나를 데려가 내가 방금 전까지 있던 곳을 잊게 만들어주는 책이 내게는 좋은 책이었다. 세계가 빙글빙글 돌았다. 책을 읽는 것은 내 안에 작지만 숨겨진 정원을 가꾸는 일이었다. 세계를 하나 더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벅차서 내 삶은 낡지도 바래지도 않았다. 읽을수록 나를 둘러싼 '삶의 협소함'을 외면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증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무엇보다 읽는 동안 내가 가장 나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버지니아 울프를 읽을 때 그랬다. 그건 마치 오래전부터 알아왔던 친구를 만나는 것과 같았다. 첫 만남의 어색함이나 서먹함은 가볍게 뛰어넘었다.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첫 데이트가 가능하다면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읽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에서 클라리사로 하여금 '이제 세상 누구에 대해서도 그들이 이렇다든가 저렇다든가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했을 때 나는 굽은 길을 오래 걷다가 비로소 목적지에 닿은 사람처럼 지쳐서 안도했다. 그건 동시에 천국과 지옥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과 닮았다. 사는 건 매일 아침 나를 둘로 나누었다가 밤이면 바늘에 긴 실을 꿰어 갈라진 몸을 꿰매고 해진 마음을 기우는 일이었다. 몰려오는 어둠 속에서 몇 시간을 버티면 아침이 말간 얼굴을 하고 창가로 다가왔다. 햇살이 그림자를 만들고 바람을 흔들어 나를 깨웠다. 인생이 이토록 '풍요롭고 다양하며 매력으로 가득 차 있으니' 살 만하지 않느냐고 시치미를 떼는 바람에 못 이기는 척 일어났던 날들이 지나면서 나는 더 많이 읽고 가끔은 쓰기도 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오랫동안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 Times Literary Supplement>에 서평을 썼다. 버지니아는 가끔 서평을 쓰기 위해 읽어야 할 책들을 일기에 적어두기도 했는데 어느 날에는‘재미없으면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책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라면 나도 이미 알고 있는 데다가 그녀가 생각하기에 독서는 살아있는 채로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 그 짧은 문장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내가 차츰 내 삶의 모양을 바꾸어 나가기 시작한 건 바로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것처럼 '보통의 독자'가 되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