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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Sep 15. 2023

혼자 런던을 걷는 것이 최고의 휴식

런던 거리 헤매기

   버지니아 울프에게 매혹당한 건 <런던 거리 헤매기>를 읽으면서였다. 글 속에서 겨울 오후의 맑은 대기와 흥성거리는 불빛을 가르며 걷는 이는 버지니아 울프이기도 했고 나 자신이기도 했다. 어둠 속 가로등 아래에서 무책임함을 망토처럼 두르고 낯선 사람이 되는 흥분은 그대로 기쁨이 되었다.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겨울 오후 도시의 모든 것을 처음 경험하는 사람처럼 설렜다. 흐르는 강물처럼 짝이는 불빛 속에서 매끄러운 몸으로 파닥이는 물고기가 된  느낌이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들뜬 마음에 추운 줄도 모르고 이곳저곳을 흘깃거리는 자신을 상상했다. 곳곳에 숨어 시도 때도 없이 나를 공격했던 일상의 압박감에서 벗어난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던 그날 이후 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들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그가 남긴 에세이와 일기가 그동안 읽었던 소설들의 주석처럼 여겨졌다.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들을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았다.


   버지니아 울프에게 산책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빼놓을 수 없는 일과였다. 오후에는 늘 산책을 나갔는데 그건 어머니가 아이들 중 하나는 꼭 아버지와 함께 산책을 하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회고록 [지난날의 스케치]에서 그 산책들이 어머니가 아버지의 건강과 즐거움을 위해 아이들을 희생시켰던 것이라고 회고한다. 당시 어린 소녀였던 버지니아 울프에게 산책은 즐거움인 동시에 고행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와의 산책은 때때로 아이들에게 가혹한 짐이 되었으나 버지니아 울프가 훗날 자신의 작품 속에서 다룬 산책들은 ‘짐‘ 혹은 ’ 고행‘이 아니라 작품 속 인물들의 뒤틀린 마음들을 정리하고 꼬인 관계를 풀어주는 장치가 되었다.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이 사망한 후 남매들은 블룸즈버리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도 버지니아 울프는 언니 바네사가 기르는 양치기 개인 거스와 함께 사방을 돌아다녔다. 태어난 후 계속 살아왔던 하이드파크 게이트 22번지나 어린 시절 해마다 여름휴가를 떠났던 세인트 아이브스 섬의 탈렌드 하우스에서처럼 버지니아 울프에게는 매일의 산책이 중요한 일과였다. 버지니아 울프에게 평생의 취미가 된 ‘거리 헤매기’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1905년 2월 어느 날의 일기에 “나는 사물들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썼다. 가끔은 바네사와 함께 버스 지붕 좌석에 앉아서 한 시간쯤 걸리는 햄스테드에 다녀오기도 했는데 버지니아는 이걸 소풍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혼자 혹은 둘이서 도시를 걸어 다니고 혹은 도시의 경계에까지 가보기도 하면서 어른이 되어 “혼자 런던을 걷는 것이 최고의 휴식이다”라고 쓰는 사람이 되었다. 그녀가 차가운 우즈 강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마을 사람들이 기억한 버지니아 울프의 모습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다운스 구릉과 습지를 걸어 다니는 중년부인이었다.

 

   그녀에게 글쓰기의 소재들은 그녀의 삶 전체였으니 산책에서 발견한 것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댈러웨이 부인]에 등장했던 지하철 역 앞의 노래하는 노파는 버지니아울프가 어린 시절 유모와 자주 갔던 캔싱턴 가든에서 출입구에 앉아있던 노파들이나 블룸즈버리에서 살 때 자주 걸었던 옥스퍼드 거리의 늙은 맹인 여자를 연상시킨다. 쭈글쭈글한 얼굴에 숄을 두르고 땅콩이나 풍선 같은 물건들을 팔고, ’ 차와 사람들이 천둥처럼 소리치며 옆으로 지나가는데 노래를 부르던 ‘ 여자말이다. 버지니아울프를 읽으며 매번 감탄하는 것 중의 하나는 스쳐 지나가는 인물, 평범한 풍경, 사소한 사건들의 치밀하고 세세한 묘사다. 그 순간, 그 인물, 그 풍경이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진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거나, 설사 기억하더라도 어떤 의미가 깃들어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작은 일들이 그에게는 정말 중요했다. 버지니아울프에게는 매 순간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홍차에 담근 마들렌 조각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매일의 산책에서 길어 올린 것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런던 거리 헤매기> 안으로 들어가 본다. 겨울 오후 4시에서 6시 사이의 산책이란 어떤 것일까? 어느 겨울 오후 갑자기 나가고 싶어진 버지니아 울프는 연필을 핑계로 삼았지만 나는 마침 떨어진 간장을 떠올린다. 문제는 ‘이왕에 나왔으니 어디 한 번 걸어볼까’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겠다. 간장 한 병을 사들고 총총걸음으로 서둘러 돌아오지 않으면 주방의 불을 끄는 시간만 늦춰질 뿐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는 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내 옆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나란히 걷고 있는 상상!


  거리에 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시간. 밤은 도시를 선명하게 만든다. 상점을 기웃거리고 불이 켜진 창문 안을 슬쩍 들여다보기도 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들을 그려본다.  헌책방이나 구두 가게에 들어가 먼지 쌓인 책을 뒤적이고 새 구두를 신은 발을 거울에 비춰본다. 불이 켜진 창문 안에 있는 이들의 삶을 상상해 본다. 겨울밤, 불빛, 사람들의 말소리, 웃음소리에 취할 것 같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체온도 오른다. 점점 어두워진다. 찬바람에 얼굴 근육이 굳고 다리가 아파온다. 더 늦으면 집에 가서 식구들에게 뭔가를 설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서둘러야 한다. 집에 돌아가기 전에 잊으면 안 되는 건 간장을 사는 일. 버지니아울프가 문방구에 들러 연필을 사는 것처럼. 집에 가까워지면서 나는 점점 변해간다. 다시 집안에서의 나, 식구들이 아는 내가 된다.  


  현실의 내가 창밖의 어둠을 응시한다. 문득 의무도 책임도 없는 내가 그리워지면(비록 오후 한 때에 불과할지라도), 그때 바로 손에 든 걸 내려놓고 문을 열 수 있을까? 연필이나 간장 따위로 핑계를 대지 않고도 집 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을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어떤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로. 그러면,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삶이 바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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