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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Oct 17. 2023

와인을 마시고, 방문을 잠그고

[자기만의 방]


   망막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두서없는 생각들이 장맛비처럼 쏟아졌다. 눈이 다시 좋아지지 않는다면 어쩌지? 만약 점점 더 나빠져서 고칠 수 없다면?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다고 하던데 의사가 언급한 그 ‘일상생활’에는 읽고 쓰기도 포함이 되는 걸까? 당장 초점이 안 맞아서 책을 읽는 건 고사하고 모니터도 볼 수 없는데, 읽고 쓰는 것을 제외한 일상이란 어떤 것일까? 지금으로서는 간단한 설명서를 읽거나 문자를 확인하는 정도는 문제가 없지만 ‘독서’는 할 수 없었다. 치료를 하고 경과를 보자는 의사의 말은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회복할지도 몰라!’와 ‘기다려도 좋아지지 않으면? 혹시 더 나빠진다면?’을 오가는 밤들이 갔다. 읽고 쓰는 걸 배제한 삶이라니 그건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이 될 터였다. 


   엄마 생각이 났다. 설거지하는 엄마 옆에서 마른행주질을 하고 있던 내게 나중에 커서 설거지 같은 건 하지 말고 살라던 엄마였다. 이제 그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가 든 나는 매일 설거지를 하며 산다. 엄마와 함께 사는 건 아니지만 엄마의 말은 여전히 생생하게 들려온다. 신기하게도 그건 내가 주방에서 설거지를 할 때가 아니라, 며칠 동안 읽고 쓰지 않을 때 들려왔는데 마치 경고 같았다. 그러다가는 매일 설거지만 하게 될 거라는 알람.


   안과에 다녀온 밤에 엄마의 그 말은 평소처럼 짧은 알람이 아니라 차들이 엉킨 도로의 운전자들이 사방에서 동시에 울려대는 경적 같았다. 일상생활이 문제없다는 말은 설거지를 하는 데 불편이 없을 거라는 말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항상 책을 옆에 끼고 살며 글을 쓰는 즐거움을 탐하는 나란 사람은 이제 사라져 버리게 될까? 


   버지니아 울프가 작품 속에서 그려내는 여인들은 집안에 있다. 사랑하는 이들과 한집에 살면서도 집 아닌 곳을 바라본다. 그녀들은 모퉁이를 돌고 작은 고개를 넘어 새로운 풍경이 펼쳐질 때마다 제일 먼저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아 헤맨다. 여자들이 매 순간 자신의 자리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은 버지니아 울프가 글을 쓰던 시대나 우리가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읽는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램지 부인은 왜 모두가 모여 앉아있는 식탁을 빠져나가 바구니를 들고 언덕을 내려가며 댈러웨이 부인은 왜 그렇게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는가.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다면 자기쯤은 조금 힘들어도 괜찮다던 램지 부인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쉬는 것은, 댈러웨이 부인이 직접 꽃을 사러 나가는 것은 왜인가. 


   [등대로]의 램지 부인은 살림을 어려워하지도 않고 소홀히 하지도 않는다. 댈러웨이 부인은 지인들이 필요로 하는 걸 먼저 챙겨주고 파티를 열어 사람을 모은다. 램지 부인의 딸들은 그런 엄마를 바라보면서 자기들은 조금 다른 인생을 살겠다고 마음먹는다. 남자들의 시중만 들지 않고 좀 더 자유분방하게 살겠다고, 어쩌면 파리 같은 데서 말이다. [댈러웨이 부인]에서도 클라리사의 딸인 엘리자베스는 엄마와는 달리 직업을 가지고 싶어 한다. 딸들은 자신의 마음과 소망 대신 남의 그것을 채우기에 급급한 램지 부인을, 이제 ‘더는 클라리사도 아닌 댈러웨이 부인’을 보면서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100년이 지난 지금의 나 역시 딸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툭 던지곤 하지 않았던가. 엄마처럼 살지 말라고. 


   버지니아 울프는 1928년 캠브리지 대학에 속한 뉴넘과 거튼 여자대학에서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이를 다듬고 보완해서 다음 해 10월에 [자기만의 방]을 출간했다. 그녀가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즉,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연에 참석한 여학생들에게 이런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 주고자 울프가 택한 전략은 ‘물어보기’였다.

 

  여자는 왜 잔디밭에서 쫓겨나는가, 여자는 왜 대학 도서관에 들어갈 수 없는가, 여자는 왜 교회당에 들어가기를 스스로 포기하는가, 여자는 왜 남자들보다 가난한가, 엘리자베스 시대의 여자들은 왜 아무것도, 일기조차도 쓰지 않았던가, 왜 남자들은 포도주를 마시고 여자들은 물을 마시는가? 무슨 이유로 남성은 그렇게 부유하고 여성은 그다지도 가난한가? 가난은 예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100여 년을 거슬러 캠브리지의 여학생들 틈에 슬그머니 끼어 앉아 연단에 선 버지니아 울프를 바라보는 상상을 한다. 끊이지 않는 의문에 혼란스럽고 당황하다가 그동안의 무지에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불려 나오는 교구관리와 몇몇 남성 학자들이 보기 민망할 정도로 딱해서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을 일그러뜨렸을 것이다. 울프가 소설가적 상상력을 동원해 만든 가상의 인물, 주디스 셰익스피어의 삶에 제인 오스틴과 브론테 자매들을 겹쳐 보다가 돌연 주변의 수많은 주디스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강연 내내 위트와 조롱과 풍자가 유쾌하다. 버지니아 울프 말마따나 커튼 뒤에 누군가가 숨어 있기라도 했다면 그는 홀로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을 것이다. 내게 [자기만의 방]은 페미니즘의 깃발을 든 투사나 기수의 글이라기보다는 넘쳐나는 문학적 상상력으로 버무린 우아한 에세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 짓고 낄낄거리다가 눈물을 흘리고 폭소를 터뜨린다. 강연을 끝내고 울프는 일기를 썼다.


  고맙게도 여자들에게 강의를 해야 하는 긴 고역이 방금 끝났다. 거튼에서 강연을 마치고, 비가 쏟아질 때쯤 돌아왔다. 굶주렸으나 용기 있는 젊은 여성들, 이것이 내가 받은 인상이다. 머리가 좋고, 열심이며, 가난하다. 그리고 떼를 지어 학교 선생이 될 운명이다. 와인을 마시고, 자기만의 방을 갖도록 하십시오,라고 담담하게 말해줬다. (1928.10.27. 일기)                                  

  

   우리에게 자기만의 방과 일 년에 500 파운드의 수입이 필요한 것, 겨울 오후에 느닷없이 뛰쳐나가 거리를 헤매는 것, 셰익스피어의 누이가 밧줄을 타고 부모의 집에서 탈출한 것의 이유는 모두 하나다. 내가 점점 약해지는 시력 탓에 더 이상 읽고 쓸 수 없을까 두려워하거나 셉티머스가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려 버리거나 버지니아 울프가 주머니에 돌멩이를 넣고 강으로 걸어 들어간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없을까 봐서. 


   모니터 저편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글자들을 읽을 수 없었을 때 막막했던 나를 구원한 건 댈러웨이 부인이었다. 그녀는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삶이라는 걸 알았다.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임을 알고 있는 그녀는 죽음에 뛰어드는 대신 삶으로 뛰어든다. 이제는 더 이상 젊지도 않고, 또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지만 여전히 삶을 사랑한다. 시력이 약해진 것을 슬퍼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읽을 수 있는 만큼 읽고 쓸 수 있을 만큼만 쓰는 것, 그러니까 내게 가능한 만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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