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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Sep 13. 2023

프롤로그 : 버지니아 울프를 읽는 것은

     

    책은 언제나 가까이 있었다. 서점에도 자주 다녔다. 그러나 읽기를 좋아하는 것일 뿐, 읽기 너머는 궁금하지 않았다. 이야기 속으로 가뿐하게 들어갔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들어갔다가 다시 튕겨 나오는 것, 내 하루는 오랫동안 그랬다. 책장 앞에 선 채로 손에 잡히는 책을 몇 페이지씩 읽고 다시 꽂아두는 버릇은 그때부터 생겼을 것이다. 책을 덮는 순간 바로 눈앞으로 달려드는 일상도 역시 내 자리였다.


   차츰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생겼다. 그중 하나가 유난했다. 한 소녀가 비 오는 날 창가에 서서 뭔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아이가 바라보는 것은 그러나 비가 내리는 바깥 풍경이 아니라 유리창에 부딪혔다가 아래로 미끄러지는 빗방울들의 움직임이었다. 동그랗고 작은 빗방울들이 모여 점점 커지다가 더 이상 무게를 지탱하기 어려우면 아래로 떨어져 버리는 장면이었다. 어떤 책인지, 소녀가 창가에 서 있던 전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잊었으나 빗방울이 유리창을 따라 미끄러져 내리는 장면은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생생했다. 불이 켜진 창문 하나가 어두운 밤하늘에 떠있는 듯 맥락도 없는 그 장면이 시도 때도 없이 돌아와서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내가 유리창에 붙어있는 빗방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버티다가 이윽고 떨어져 버리고 마는. 그 장면이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또 하나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누구의 어느 작품인지 궁금했지만 확인하지 못한 채로 몇 년이 지났다. 그 책이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이고 소녀는 엄마가 임종을 맞이하는 동안 방 밖에서 비가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던 델리아였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문장들을 다시 읽는 순간 그게 내 읽기의 원체험이었다는 걸 알았다. 작은 빗방울이 매번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동안 아이는 자랐고 살림이 제법 손에 익었다.


    책이 한층 다가오는 걸 느꼈다. 종종 약속이 있다는 것도, 빨래가 밀렸다는 것도, 식사 준비를 하려면 제때 부엌에 나가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내가 '다른 세계에 출입하는 것'을 즐긴다는 걸 알게 됐다. 나를 데려가 내가 방금 전까지 있던 곳을 잊게 만들어주는 책이 내게는 좋은 책이었다. 세계가 빙글빙글 돌았다. 책을 읽는 것은 내 안에 작지만 숨겨진 정원을 가꾸는 일이었다. 세계를 하나 더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벅차서 내 삶은 낡지도 바래지도 않았다. 읽을수록 나를 둘러싼 '삶의 협소함'을 외면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증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무엇보다 읽는 동안 내가 가장 나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버지니아 울프를 읽을 때 그랬다. 그건 마치 오래전부터 알아왔던 친구를 만나는 것과 같았다. 첫 만남의 어색함이나 서먹함은 가볍게 뛰어넘었다.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첫 데이트가 가능하다면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읽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에서 클라리사로 하여금 '이제 세상 누구에 대해서도 그들이 이렇다든가 저렇다든가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했을 때 나는 굽은 길을 오래 걷다가 비로소 목적지에 닿은 사람처럼 지쳐서 안도했다. 그건 동시에 천국과 지옥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과 닮았다. 사는 건 매일 아침 나를 둘로 나누었다가 밤이면 바늘에 긴 실을 꿰어 갈라진 몸을 꿰매고 해진 마음을 기우는 일이었다. 몰려오는 어둠 속에서 몇 시간을 버티면 아침이 말간 얼굴을 하고 창가로 다가왔다. 햇살이 그림자를 만들고 바람을 흔들어 나를 깨웠다. 인생이 이토록 '풍요롭고 다양하며 매력으로 가득 차 있으니' 살 만하지 않느냐고 시치미를 떼는 바람에 못 이기는 척 일어났던 날들이 지나면서 나는 더 많이 읽고 가끔은 쓰기도 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오랫동안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 Times Literary Supplement>에 서평을 썼다. 버지니아는 가끔 서평을 쓰기 위해 읽어야 할 책들을 일기에 적어두기도 했는데 어느 날에는‘재미없으면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책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라면 나도 이미 알고 있는 데다가 그녀가 생각하기에 독서는 살아있는 채로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 그 짧은 문장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던 ‘보통의 독자’가 되었다. 이 글들은 바로 그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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