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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un 25. 2024

무거운 짐을 떨쳐버린 나무처럼

데드 헤딩

  장미가 한창일 때는 매일 가위를 들었다. 꽃이 시들고 나면 씨방을 만드는데 힘을 쓰느라 계속 꽃을 피우지 않는다고, 그러니 장미를 오래 보려면 시든 꽃송이는 때를 놓치지 말고 바로 잘라 주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게는 그것 말고도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장미를 가꾼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장미가 하나 둘 피기 시작할 때부터 아침마다 마당에 나가 장미를 살폈다. 어여쁘고 향기롭고 신기했다. 고개를 조금 숙인 꽃이 있어서 손을 댄 순간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살짝, 그야말로 가볍게 스친 게 전부였는데 바로 다음 순간 꽃잎은 모두 떨어지고 줄기 끝에 꽃받침만 남았다. 우연히 손가락 끝이 닿은 것뿐인데 속절없이 떨어져 쌓인 꽃잎들이 아득했다. 방금 본 것이 무엇일까? 내가 뭘 잘못한 것일까? 나중에서야 장미가 그런 식으로 진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 충격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렇다. 장미는 느리게 피었다가 순식간에 져버리곤 했다. 수십 장의 꽃잎을 겹겹이 포갠,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서는 언제까지나 괜찮을 것 같은 표정을 짓다가 한 순간에 화르륵 꽃잎을 떨구었다. 계절이 몇 번을 바뀌었는지 나는 저절로 비슷비슷한 장미꽃 중에서 어떤 것을 먼저 잘라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다 해도 까딱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미처 줄기를 자르기 전에 보란 듯이 내 앞에서 꽃잎들을 쏟아내는 녀석도 있으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흐트러진 꽃잎들을 바라볼 때마다 마지막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꽃의 마지막, 계절의 마지막, 나의 마지막, 삶의 마지막 같은.


  유월이 오면 아침마다 장미 무덤이 새로 생겼나 살핀다(제때 잘라주지 못한 꽃들은 스스로 떨어져 낱낱의 꽃잎으로 쌓였는데 나는 그걸 꽃무덤이라 불렀다). 밤새 꽃잎을 떨군 송이가 없으면 한결 찬찬히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말끔한 얼굴로 능청스레 나는 아직 아니라고 하는 녀석도 있고 고개를 숙이며 어서 잘라달라고 하는 녀석도 있다. 줄기 끝에 여러 송이가 모여 피어있으니 장미 가지는 휘어져 있기 일쑤다, 만개한 장미 송이들을 잘라내면 휘어져 있던 가지가 순식간에 튀어 올랐다. 가벼워진 것이다. 어떤 장미는 가위가 제대로 닿기도 전에 꽃잎을 떨어뜨렸다. 아니, 쏟아냈다. 그러면 꽃잎을 떨군 꽃받침이 붙어있는 가지가 위로 쑥 올라왔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거나 굽혔던 허리를 펴듯이. 마지막이 오기 전에 다시 한 번 처음처럼.


   지난 며칠 동안 날아갈 것 같은 안도감이 나를 감싸고 있다. 일이 끝났다는 생각에. 잘됐건 못됐건 간에. 그리고 2월 이래 처음으로 내 머리는 무거운 짐을 떨쳐버린 나무처럼 꼿꼿이 섰다.                                                                                
                                                                     버지니아 울프, 1936년 12월 31일 일기


  버지니아 울프가 소설 [세월]의 교정쇄를 앞에 두고 쓴 일기다. 스스로 '책 하나를 쓰기 위해 [세월]을 쓸 때의 자신처럼 고생한 사람이 또 있을까'라고 할 만큼, 마치 '끝이 안 보이는 출산 과정 같았다고' 언급한 게 그 해 11월 10일이었다. 때로는 확신이 있었지만 더 많은 순간 불안했던 시기를 보내고 난 후 '무거운 짐을 떨쳐버린 나무처럼 꼿꼿이 설 수' 있었다는 작가의 심정을 나는 내 장미들을 떠올리면서 완벽히 이해했다. 사실 이전까지는 이 문장을 기억하지 못했다. 매일 장미를 자르던 유월 초순의 어느 날, 우연히 펼친 [어느 작가의 일기]에서 이 글을 발견했던 것이다. 서늘한 기쁨이 온몸을 감싸던 기분, 최고라는 말은 그럴 때 쓰는 것일 테다.



  빗소리가 들린다. 이제 몇 송이 남지 않은 장미들과 한창 꽃잎을 펼치고 있는 수국들은 아이를 가진 여자처럼 몸을 부풀리고 있다. 속을 빗물로 가득 채울 요량일 것이다. 아침이 오면 밤새 내린 비로 진주 같은 빗방울을 달고 있는 식물들이 나란한 마당으로 나가서 꽃들을 흔들어 깨우리라. 내가 요정의 지팡이라도 가진 것처럼 무거워진 꽃송이들을 건드리면 몇몇 아이들은 고개를 '꼿꼿이 세우며' 튀어 오를 것이고 어떤 아이는 떨어지는 빗방울과 함께 화르륵 떨어져 내릴 것이다. 튀어 오르고 떨어져 내릴 때마다 내 얼굴에도 빗방울이 튈 것이고. 그러면 나는 깜짝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설 것이다. '무거운 짐을 떨쳐버린 나무처럼' 가볍게,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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