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력서라니,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다. 가지고 계신 이력서가 있으면 보내주세요. 아, 이력서는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는데 얼버무리는 내게 이력서 양식을 보내주겠다고 한다. 메일이 금세 날아왔다. 사실 이력서 양식이 궁한 게 아니라 도통 이력이란 게 없는 사람이어서 이력서의 갖가지 항목들을 어떻게 채우느냐는 게 문제였던 걸 전화기 너머의 담당자가 몰랐다 해도 그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진을 넣고 이름과 주소, 연락처와 생년월일을 적어 넣을 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소속! 소속이라니, 벌써 몇십 년째 어떤 곳에도 소속되지 않고 살아왔는데, 무소속이라 쓸 수도 없고(사실은 무소속이라 썼다가 갑자기 웃음이 터지는 바람에 혼자서 한참을 웃었다는 이야기), 빈칸으로 놔뒀다. 출간도서 목록과 수상경력, 활동경력 등이 이어진다. 어느 항목은 채우고 어느 항목은 비워놓으면서 마지막 항목까지 내려가고 보니 한 장의 종이에 들어간 나란 사람이 보인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는 이런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계속 중얼거리면서 안녕하세요. 요청하신 이력서 어쩌고 하면서 메일로 보내버렸다.
오후에는 비가 오락가락했다. 이 정도 빗방울 정도야 하고는 나가서 토마토를 송이째 따고 대파를 뽑고 가제보 아래에 고양이들과 나란히 앉아서 비 구경을 했다. 잔디는 엉망이고 장미는 헝클어진 마당에 과꽃과 일일초가 무성하다. 파를 다듬었다. 누렇게 시든 겉잎을 떼어내고 뿌리를 잘랐다. 벌레 먹은 잎이 없나 살폈다. 토마토도 성하지 않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삶도 상처투성이인데 토마토 정도야 하는 기분이 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깝네, 어쩌지 하고 호들갑을 떨었을 게 분명하지만 상처는 아물고 계절은 지나기 마련이라는 걸 이제는 모른 척할 수가 없다. 대파를 챙겨 들고 쌀 바가지를 머리에 쓰고 들어왔다. 빗소리를 들으며 잠깐 졸았다.
며칠 만에 씻었다. 안과 시술 후 삼일만이다. 힘쓰는 일, 운동, 샤워하지 마세요. 그 외 일상생활은 하셔도 됩니다,라고 했지만 힘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상생활이 있나? 마늘 한쪽 으깨려고 해도 힘이 들어가는데. 환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멀쩡하지만 세수도 할 수 없으니 그렇게만 보면 정상은 또 아니고, 이력서는 썼지만 정작 이력은 없는, 나는 또 한 번 경계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