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 배치를 바꿨다. 왼편으로 보이던 숲이 정면으로 바라다 보인다. 처마 너머 산의 나무들이 겹겹으로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 시야가 달라지니 풍경이 바뀐 것이다. 창밖 풍경이 바뀌고 보니 세상이 바뀐 것 같기도 하다. 설마 그래서였을까?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부단히 집을 뒤집었던 것, 가구들의 자리를 다시 잡으며 부산을 떨었던 이유가 바로 나를 둘러싼 세계를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함이었을까? 무엇을 어떻게 바꾸고 싶었을까?
생각해 보면 집 뒤집기의 기원은 이사였다. 이사는 보다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조금 더 넓은 집으로, 햇빛이 더 많이 들어오는 집으로, 아파트에서 주택으로, 옮길 때마다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넓은 집에서는 서재가 생겼고 남향인 아파트를 구했을 때는 꽃이 피고 새소리가 들렸다.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했을 때 내 안에 숨어있던 것들이 한 번에 아우성을 치며 밖으로 쏟아져 나와 나는 쓰는 사람이 되었다. 마지막 이사로부터 15년이 지났지만 더는 이사를 할 마음이 없으니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려면 집을 뒤집고 가구들의 자리를 바꾸어 풍경에 변화를 주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사를 하거나 집안의 가구들을 달리 배치하는 것은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음식을 만드는 일에 빗대자면 레시피를 바꾸는 일이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요리법을 바꾸면 이제까지와는 다른 음식을 만들 수 있지 않은가. 그 마음으로 책장정리를 했다. 정리를 할 때마다 어떤 책을 남기고 어떤 책을 버릴 것인가에 관한 기준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 기준이라는 것이 매번 조금씩 바뀐다는 점이다. 책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번 책정리에서 살아남았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다. 변덕 심한 주인은 주기적으로 책장을 뒤집을 테고 그때마다 살아남기란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뭔가를 버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게 원칙이라지만 그 기준을 가능한 한 정교하고 세밀하게 다듬지 않으면 억울하게 쫓겨나는 책들이 생겨나고 다시 사야하는 책들도 생긴다.
결혼 전 남편이 살던 집을 이번에 헐고 다시 지었다. 공사기간 중 짐을 보관할 때가 마땅치 않아 우리 집으로 가져왔다. 서재와 창고와 현관을 점령한 상자들을 볼 때마다 시곗바늘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휙휙 돌아가는 시계를 꿈꿨던 나는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공사가 늦춰진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신음했다. 내가 방에 틀어박혀 꼼짝 앉는 동안 남편은 상자들이 마구잡이로 쌓여있는 창고 같은 서재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휘청거리는 겉모습과는 달리 내 방에서 안전했다. 동굴처럼 아늑한 방에서 읽고 꿈꾸고 잤다. 어느 일요일 아침에 농담처럼 짐상자들이 돌아갔고 며칠간의 정리 후에 서재를 되찾았다. 다시 말해 핑계가 사라졌다. 이제 다시 쓰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