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준영 Jun 06. 2024

지구본 불 밝히고 잠드는 아이

백과사전과 함께 시작한 여행


"문디야 너는 사람을 참 귀찮게 만든다."


저는 묻고 싶은 것, 알고 싶은 것이 유달리 많은 아이였습니다. 구에 큰 집으로 가는 길. 자리에 앉은 동생은 새근새근 잠에 는지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구 갈 때마다 아버지께서 번 차를 멈춰 세우는 금강 휴게소는 어디에 있고, 몇 킬로나 남았나 알아볼 참에 도로 관광지도책을 뒤적입니다. 그러다 자기 궁금한 게 습니다. 


"엄마, 여기 지도에는 왜 경부 고속도로라고 안 그러고, 경부 고속국도라고 그래?" 


맨날 경부 고속도로 타고 간다고 하는 데 정작 지도에는 '고속국도'라고 혀있으니 궁금하지요.


요즘 아이들 같으면 바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네이버에 물어보겠죠. 챗GPT에 물어보는 아이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땐 휴대전화가 있기는커녕 인터넷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집에 컴퓨터도 없었습니다. 



엄마 아빠는 세상 모든 걸 다 아실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궁금한 게 생길 때마다 자꾸 묻고 또 물어대서 엄마를 못살게 굴었습니다. 촉새 같은 입에서 나오는 질문들을 하나, 둘, 셋 계속 받아주다 보면 엄마는 어느새 지쳐버립니다. 사실 엄마도 큰 집에 도착하기 전에 눈 좀 붙이고 싶은걸요.


"인제 그만 물어보고 좀 자라."


운전하시던 아버지께서 "경부 고속도로는 나라에서 만든 도로라서 고속국도라고 하는 거야"하고 엄마를 거들어 제 가려운 부위를 대신 긁어주시지만, 이미 엄마한테 한 소리 들어서 기분이 잔뜩 나빠진 저는 심술 난 표정을 짓고 분풀이 대상을 찾습니다. 그게 누구일지는 불 보듯 뻔했습니다. 편안하게 자는 애먼 순둥이 동생을 괜히 손가락 바늘로 쿡쿡 찌릅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백과사전 한 질을 사 오셨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어린이 백과사전이었는데, 나중에는 서른 두 권짜리 대백과사전이 책장  단을 위엄 있게 차지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두툼한 백과사전들을 방바닥에 잔뜩 널브러뜨려 놓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세계 여러 나라 국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국기(國旗)' 표제어가 수록된 4번 책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으로 올라가던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렸는데, TV 중계방송 화면에 나오는 처음 보는 국기들이 마냥 신습니다. 그래서 규칙도 모르고 아이들 눈에 시시해 보이는 경기까지 챙겨봤습니다. 그런데 백과사전에는 스포츠 강국이 아니라서 중계방송에 나올 기회조차 없었던 수많은 나라 국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국기들을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따라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걸 학교로 가져가서 친구들에게 이게 어떤 나라 국기인 줄 아냐고 물어보며 자랑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듬해, 그러니까 제가 5학년이 되던 해, '도하의 기적'으로 회자하는 미국 월드컵 최종 예선전이 열렸는데, 한국과 최종예선에서 싸우게 된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일본 국기를 손수 그려 TV 모서리에 접착테이프로 딱 붙였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국기를 어떻게 그렸느냐고요?


 구불구불 지렁이 같은 게 뜻이 있는 씨라는 건 그땐 정말 몰랐습니다. 백과사전 보고 뚤빼뚤 따라서 그렸는데, 그게 이슬람교에서 신앙 고백(샤하닷)을 뜻하는 아랍어 글귀였던 거죠. 그러고 보면 저는 코흘리개일 때 이미 샤하닷을 사경(寫經)한 셈이네요.




지구본은 레고와 함께, 제 손을 한시라도 떠나지 않는 친구나 다름없는 존재였습니다. 지구본 안에 전구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잠을 잘 때 소등(消燈)하고 침대 머리맡에 둔 지구본을 전원에 연결하고 스위치를 켜면, 지구본은 밤하늘 달덩이처럼 환하게 빛을 발산했습니다. 주말의 명화에 공포영화가 나온 날에는 혼자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잠 청하는 게 무서워서 지구본을 밝혀놓고 잘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무서우면 베개를 품에 안고 살금살금 안방으로 들어가 엄마 아빠 사이에 끼어들었죠.




지구본을 룰렛 돌리듯 뱅뱅 돌리며 놀다가, 손가락으로 꾹 힘줘 눌러 멈춰 세웁니다. 그리고 손가락이 어느 나라에 내렸나 살펴봅니다. 가끔은 카보베르데 같은 생뚱맞은 나라에 시선이 꽂히기도 했습니다. 어떤 나라일까 궁금해집니다. 그러면 백과사전이 꽂힌 책장 앞으로 몸을 움직여 '카'로 시작하는 표제어가 들어있을 법한 책을 골라 뽑아 듭니다. 인구는 몇 명이고, 수도는 어디고, 국민소득은 얼마고 이 작은 나라를 소개하는 각종 지표가 제법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당시로는 귀하디귀한 사진 자료까지 몇 점씩 곁들여 있었죠. 



다음 날 아침 담임 선생님한테 손바닥에 회초리 맞을 걸 뻔히 알면서도, 숙제하려고 펴두었던 교과서를 내팽개쳐 버렸습니다. 숙제 다 했냐는 엄마의 추궁에 "응"이라고 짧게 대답해 놓고, 방바닥에 드러누워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며 카보베르데 여행을 시작합니다. 아직 제주도도 안 가봐서 비행기를 탈 일조차 없었으니, 공항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거기에 뭐가 있는지도 몰랐지만, 장난감 비행기를 만지작거려가며 카보베르데에 도착합니다.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니까, 아버지께서는 모형 비행기와 조종사들이 넥타이에 다는 배지를 사주셨습니다.



저녁 다 차려놨으니, 식탁으로 오라는 어머니의 부름이 들리는데, 들은 체 만 체 책장에서 눈을 떼지 않습니다. 그리고 카보베르데가 어떤 나라인지 주요 정보들을 아예 외워버립니다. 아마도 이 촉새 같은 아이는 카보베르데에 꼭 가본 사람처럼 밥상머리에서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 같네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