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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Jun 09. 2024

희숙이랑 나랑 책상 위 베를린 장벽

백과사전과 함께 시작한 여행

백과사전과 함께 시작한 여행

저출생 때문에 교실에서 학생이 사라졌다고 다들 아우성칩니다. 불과 한 세대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0여 전으로 돌아가면 아이들 오십여 명이 북적이며 소란을 피우는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 속에 선생님 말씀 안 듣고 수업 시간에 딴청만 피우는 꼬맹이 하나가 눈에 띕니다.



제가 국민학교에 들어갈 무렵, 우리 가족은 옛날에 허허벌판이었다는 수원에서 나름 신도시라는 매탄동으로 다시 이사를 옵니다. 친가와 외가가 있는 대구의 한 대형 병원에서 제가 첫울음을 터뜨렸다지만, 자라난 곳으로 고향을 꼽으라면 당연히 매탄동이지요.



수원에서 공직 생활을 하셨던 아버지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뱃속에 저를 품은 어머니와 함께 5층짜리 주공아파트 건물들이 빼곡히 늘어선 신매탄아파트 단지에 자리를 잡으셨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제가 태어났고, 3년 하고도 3개월이 조금 더 지나서 하나뿐인 동생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신매탄아파트는 우리 네 식구가 완성된 장소입니다.



그런데 제가 유치원에 다닐 즈음에 우리 가족은 매탄동을 잠시 떠나 있게 됩니다. 권선동에 어딘가였던 것 같은데 명진아파트라 불렸던 한 동(棟)뿐인 주택이었고 헌 집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제 방에 침대가 놓인 자리의 벽지에는 크레파스로 누군가 그림을 그려놓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거든요.



저는 그곳에서 "비둘기집처럼 예쁜 유치원"이라는 가사 한 소절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세림유치원을 다녔습니다. 그 기억의 편린은 망각의 심연(深淵)으로 가라앉지 않고 왜 아직도 물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을까요?


음, 그건 말이죠. 유치원 선생님들이 준비한 제 생일 파티 때, 말수가 적고 다소곳한 소녀가 제 목에 사탕목걸이를 걸어줬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 쉿! 이건 엄마한테는 비밀입니다. 사탕목걸이 걸어줄 친구를 뽑으라는 선생님 말씀 끝나기가 무섭게 정말 기다렸다는 듯이 제가 그 앨 찍었거든요. 순간은 앨범  사진에 박제되었습니다. 




매탄동으로 다시 돌아온 우리 가족은 신매탄아파트 단지 건너편에 조성된 15층짜리 고층 신축 아파트, 삼성1차아파트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 주위로 동남아파트, 성일아파트, 현대아파트, 삼성2차아파트처럼 같은 키 높이 아파트들이 줄줄이 한 뭉텅이가 되어 대단지를 이뤘습니다. 우리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 없는 다른 재미난 놀이기구를 찾아 자전거를 몰고 다른 아파트 단지로 동네방네를 휘젓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도 했죠.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니 손에 이끌려 웬 학교 운동장에 다른 아이들과 나란히 줄 섰는데 그때가 매탄국민학교 입학 날인가 봅니다. 매탄국민학교는 저랑 나이가 같은 1982년에 개교한 신생학교였는데, 신매탄아파트 단지의 한구석 모퉁이를 차지했습니다. 동네에서 가장 가깝다는 효원고등학교와 매원중학교도 도시 개발 속도에 보폭을 맞춘 듯 제가 국민학교에 입학했던 해를 전후로 1987년과 1989년에 각각 문을 열었죠.



학교 울타리 너머로는 '산드래미'라 불렸던 논농사 짓는 농촌 마을이 드넓게 펼쳐있었습니다. 여름에는 개구리합창단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겨울에는 얼어붙은 논두렁에 스케이트장이 열렸죠. 피겨 스케이트 신발 신고 뒤뚱뒤뚱 걷다가 엉덩방아 찧던 그때가 제 삶을 통틀어 빙판을 가르는 시늉이나 해봤던 유일한 순간입니다.



학교가 파하면 아이들은 신발주머니를 흔들며 간판에 '원진슈퍼'라고 적힌 후문 문구점으로 달려갔고, 주머니 속에서 절렁절렁 부딪쳐 소리를 내는 동전 몇 개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한 개에 백 원 하는 부숴먹을 라면이랑 빨아 먹는 막대사탕 따위 군것질거리 두어 개와 바꿔 먹고 개구리 잡으러 논두렁으로 향했습니다. 개구리를 기필코 잡겠다며 먼저 발견한 아이가 신발을 벗고 막 모내기를 마친 논두렁에 발을 내디디려는 찰나, "네 이놈들!" 농부의 호통에 화들짝 놀란 우리들은 부리나케 줄행랑을 칩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가 유행하고 텔레비전 광고에도 나오던 시절, 학교에는 교실이 부족하여 아이들은 오전반 오후반으로 갈려서 한 교실을 나눠 썼습니다. 저는 늦잠을 자도 되는 오후반이 좋았죠. 그렇지만 오후반이라고 마냥 늦잠 자도록 어머니께서 그냥 놔두는 법은 없었습니다. 아침 일찍 규칙적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게지요.



교실에서 남녀 학생이 짝꿍이 되어 책상을 반으로 갈라 사용했는데 가끔 짝꿍이랑 다퉈서 토라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책상 위에는 넘어오지 말라며 동쪽과 서쪽을 가르는 38선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미 중고등학생이 되었을 형과 누나들이 벌인 유치한 싸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선을 새로 그을 필요가 없는 책상들도 있었죠.



국립춘천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세워진 베를린 장벽을 보고 그때 그 시절을 회상했습니다.



대개 하루 이틀이면 누군가 먼저 나서서 화해의 손길을 내밉니다. 그런데 허구한 날 티격태격 싸우다 그만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 매듭이   풀리는 때도 있는데 이럴 때는 교과서와 필통으로 단단한 벽을 쌓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38선이 아니라 아예 베를린 장벽인 셈이죠.



4학년 때였나 5학년 때였나 짝꿍이었던 희숙이와 어떤 일로 다투고 나서 38선을 사이로 며칠째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그림을 그리는 미술 시간이 되었네요. 저는 베를린 장벽은 이미 무너졌다며 손을 선 너머 희숙이 도화지 위로 올렸다 잽싸게 빼는 장난을 치면서 그림 그리기를 방해했는데, 희숙이는 다시 넘어올 제 손등을 잔뜩 노렸다가 가장 굵디굵은 수채화 붓으로 아무렇게나 막 그어버렸습니다.



제 손등은 새카만 물감으로 얼룩졌고, 희숙이는 혀를 날름 내밀더니 "그거 안 지워질 거다"라며 저를 골려댔습니다. 약이 바짝 오른 저는 몇 번 더 희숙이를 방해했는데, 그때마다 희숙이 붓놀림에 손등이며 손가락이며 물감 범벅이 될 뿐이었습니다. 계속해 봐야 제 손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아 장난 걸기를 멈추고 물감 묻은 부위를 다른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러 닦아봤지만, 물감이 지워지기는커녕 옮겨 묻기만 했죠. 시간이 흐르면서 물감이 굳어 살갗에 뻑뻑한 느낌이 들었는데, 마침 교실을 돌며 아이들 그림을 지도하시던 선생님께 물감투성이가 된 손을 그만 딱 걸려서 억울하게도 저만 앞에 나와서 손 들고 벌서고 말았네요.



그래도 그날 희숙이랑 화해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희숙이네는 머나먼 미국으로 훌쩍 이민을 떠났습니다. 짝꿍인 저한테도 말 한마디 없었는데 선생님께서 갑자기 희숙이를 앞으로 불러내어 학우들에게 작별 인사시켰을 때 비로소 저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희숙이네가 간다는 로스앤젤레스를 백과사전에서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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