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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Jun 21. 2024

"엄마, 우리도 미국 가자!" 철부지의 이민 타령

빼앗긴 축구공


"미국에서는 한 반에 스무 명도 안 된단다"


미국에 대한 환상을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잔뜩 불어넣으셨습니다. 미국처럼 우리나라가 부강해지면 나라에서 학교를 많이 짓고 선생님도 많이 뽑을 겁니다. 그러면 교탁 앞에 딱 붙어, 교실 뒤편까지 숨 막힐 정도로 다닥다닥 열을 지어 늘어선 책걸상들을 좀 들어내고 우리들이 숨 쉴 틈을 마련할 수 있겠죠.



그래서 짝꿍 희숙이네가 건너갔다는 미국을 동경하는 어린 마음은 부푼 풍선처럼 계속 커져만 갔습니다. 희숙이네 말고도, 태평양을 가로질러 이역만리로 날아가 작별을 고한 친구들이 다른 반에도 적어도 한 명씩은 나왔습니다. 그렇게 빈자리가 생기더라도 어디선가 전학을 온 친구로 곧장 채워지곤 했습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육상 경기 시상식 때마다 울려 퍼졌던 미국 국가(國歌) 곡조가 제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애써 기억해 내어 흥얼거렸습니다. 음정도 박자도 엉망진창이었을 테죠. 시간이 많이 흘러 제가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갈 즈음 집에 드디어 인터넷이 들어왔고 그때 합창단이 부르는 미국 국가 음원을 듣게 되었습니다.


"오, 말해주오. 성조기(星條旗)는 지금도 여전히 휘날리고 있는가?"


그제야 성조기를 찬양하는 노랫말 내용을 접하게 됐죠.


남의 나라 애국가가 뭐 그리 좋다고... 좀 웃기지 않은가요? 그런데 1990년대를 보낸 제 유년기를 곱씹어보면, 이 철부지 꼬맹이가 미국이라면 무조건 다 좋은 줄 알고 환상을 가질 법한 이유가 산더미 같았답니다.




제가 국민학교 2학년 때,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걸프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일요일 아침, KBS에서 방영되었던 '전! 달리는 일요일'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는데, 전쟁 관련 긴급 속보가 자막으로 화면 아래를 타고 지나갔습니다. 당시로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버금가는 엄청난 사건이었을 겁니다.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우리나라가  수입그때나 지금이나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같은 걸프만 국가에 크게 의존하는데, 이곳에서 울려 퍼진 포성이 나라 안에서 마나 긴박한 사안이었을까요?



이 전쟁은 베트남 전쟁 패배로 땅바닥에 떨어졌던 미국의 위상을 한껏 올려놓습니다. 이슬람교의 양대 성지, 메카와 메디나의 수호자라는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은 이제 막 쿠웨이트를 냉큼 잡아먹은 사담 후세인이 곧 사우디의 유전(油田) 지역에 포크를 꽂으리라 보았고, 혼자서는 이라크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미국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리하여 미군이 무슬림의 신성한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된 거죠. 



세계 5위의 군사력을 뽐냈다던 침략군 이라크 공화국수비대는 미군의 공세 앞에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그 결과 쿠웨이트는 영토 주권을 빠르게 회복하였고, 침략 행위를 금지하는 유엔 헌장에 담긴 세계 질서가 지켜졌습니다. 이제 전 세계의 독재자들은 제 근육만 믿고 남의 나라에 섣불리 쳐들어갔다가는 '세계의 경찰' 미군과 싸워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산 진영의 맹주 소련이 무너졌고 이제 지구상에는 미국과 힘 겨루기를 할 나라가 남지 않게 됩니다.



매년 6월 25일이 돌아오면 전교생이 지지직 거리는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켜놓고 6.25 전쟁 관련 빛바랜 기록 영화를 시청했습니다. 재작년에도 보고, 작년에도 보고, 올해도 보고, 내년에도 또 볼 영상인데도, 카키색 군복을 입고 모자에 볼썽사나운 붉은 별을 달아 더 괴기스러워 보이는 공산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와 한반도 지도가 온통 빨갛게 덮이는 걸 보노라면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설악산 가느라 구불구불 고갯길, 대관령 넘는 길에 잠시 들렀던 이승복 기념관에서 봤던, 완장을 찬 무시무시한 무장공비들이 느닷없이 교실로 들이닥쳐 절 잡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대한민국이 이대로 사라질 것 같았는데 파이프를 입에 문 맥아더 장군이 등장하고, 유엔군은 전세를 뒤집습니다. 수원도 곧 파란색 영역 안으로 다시 들어옵니다. 6.25 전쟁이 터지기 두 해 전 달구벌에서 출생하신 아버지께 인민군이 대구 시내에 들이닥쳤는지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인민군이 팔공산을 넘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때마침 미군이 도와주지 않아서 대구 시내에 인민군이 들이닥쳤더라면 제가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이윽고 찾아오는 반공 포스터 그리기 시간에 별 50개가 점처럼 찍힌 성조기를 단 미군 탱크를 그릴 정도로 저는 미국을 동경하는데, 어느 날 그게 부메랑이 되어 선생님께 날아옵니다.




저는 축구공을 매일 학교에 가져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공이 88 올림픽 공인구라고 하셨는데, 정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게 좋은 공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제 공을 탐냈던 친구 녀석이 좀 가지고 놀겠다며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내키지 않았으나 공을 빌려달라고 계속 닦달하길래 마지못해 내줬습니다.  



그 녀석은 공을 발아래에 두고 굴리고 놀았는데, 수업 시간에도 발장난을 치다가 공이 그만 교탁으로 떼굴떼굴 굴러갔습니다. 중에 아이가 커가면서 몸이 불편하셨던 선생님께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셨죠. 


"너희들 수업시간에 공 가지고 놀지 말라고 선생님이 몇 번이나 말했어? "이 공 압수다"


차라리 회초리를 맞는 게 더 나았을 겁니다. 



공을 빼앗긴 게 서러웠던 저는 하굣길을 터벅터벅 울면서 걸어갔습니다. 억울했습니다. 제가 그런 게 아니라, 공을 친구에게 단지 빌려줬을 뿐인데. 억울함에 복받쳐 머니 얼굴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습니다. 


"미국에서는 선생님이 들을 때리지도 않고, 공도 안 빼앗아 간다는 데 우리도 미국 가자" 


희숙이네도 미국엘 갔잖아요. 부지 꼬맹이의 대책 없는 생떼가 시작된 거죠.


제가 울음을 그치지 않고, 오히려 더 크게 울면서 어머니한테 미국 이민 가자고 하니까, 어머 영 안 되겠다 싶었나 봅니다. 정말 미국에서 살다 오신 영어 과외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 선생님은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거기서 남편될 사람을 만나 결혼했고, 한국에 돌아와 당시 저보다 네댓 살 어린 아들을 키우고 있는 유학파 '워킹맘'이었습니다. 는 뺀질뺀질하게 별별 핑계를 대서라도 수학 과외는 빠지려 했는데, 영어 배우러 가는 길은 그리 싫지 않았습니다. 생님이 미국에서 나온 교재들을 사용해서 신기한 것도 많았고, 영어 알파벳이 새겨진 블록으로 단어 게임도 하고 아무튼 재미났거든요.



지종을 어머니한테 다 들은 영어 선생님은 "미국 선생님들은 한국 선생님만큼 정(情)이  않아. 다 너희들을 사랑해서 착한 아이 되라고 그런 거니 반성하고 있으면 공 돌려주실 거야"라며 다정한 목소리로 저를 살살 달래셨습니다. 선생님과 이야기하다 보니 저도 어느새 울음을 뚝 그치게 되었고, 어머니의 작전이 성공한 듯합니다.



공은 일주일 후에 돌려받았고 철부지의 난데없는 미국 이민 타령은 그렇게 일단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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