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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Jun 24. 2024

숫기 없는 애송이라지만 놀리지는 말아 주세요

진실게임

"너무슨 남자애가 이렇게 숫기가 없니?"


중학생 때였는지 고등학생 때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주민등록증을 발급할 나이가 됐다며 동사무소에 불려 갔습니다. 자전거를 끌고 가보니 지문 등록을 해야 한다며 다섯 손가락 지문을 채취하겠답니다. 요즘 같으면 개인신상정보가 모두 전산화되었으니 디지털 기기에 손가락을 대어 지문을 채취하겠지만, 당시에는 시커먼 잉크를 손가락 마디마디에 일일이 묻혀서 지장을 찍는 방식으로 지문을 채취했죠.



이런 번거롭고 귀찮은 일은 막내 직원의 몫이었겠죠? 많아야 스물 후반쯤 돼 보이는 동사무소 직원 누나가 고무 롤러를 시커먼 잉크에 담가 적시더니 저의 오른손 손가락에 대어 박박 밀어나갑니다. 칠에 빈틈이 보일 세라 제 손목을 잡아 비틀어가며 꼼꼼하게 덧칠하네요. 감촉이 끈적끈적한 잉크가 살갗에 들러붙는 게 거슬렸던지, 어디 뜨거운 것에 데기라도 한 듯 손을 자꾸 오므립니다. 그러자 동사무소 직원 누나는 손바닥을 쫙 펴야 잉크 칠이 쉽다면서, 제가 남자애답지 않게 숫기가 너무 없다며 면박주네요.


"에이, 아줌마가 자꾸 만져대니까 애가 부끄러워하잖아."


업무를 보는 둥 마는 둥, 주변에 앉아 조간신문이나 넘기던 한 남자 직원이 짓궂게 농을 던집니다. 반말하는 꼬락서니로 보아하니 누나보다 직급이 한참 높았겠죠.


누나는 그 말에 기분이 팍 상했는지 남자 직원을 슬쩍 한번 째려보더니 "네가 자꾸 손을 오므리니까 빨리 안 끝나잖아"라고 하면서 검댕 같은 잉크가 손바닥에도 묻든 말든 롤러를 거칠게 꾹꾹 눌러가며 제게 화풀이하듯 칠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때 처음 들었던 숫기 없다는 말이 아직도 제 귓가를 맴돕니다.


뭐, 사실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습니다.




같은 반 친구 중에서 한 여자아이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양옆으로 곱게 땋은 머리를 어깨 아래길게 내린, 멜빵이 달린 치마가 잘 어울리는, 단아하면서도 활달한 성격을 지닌 아이였습니다. 공부도 우등생까진 아니어도  만큼 하는, 똘똘하고 야무진 애란 소리를 들었죠. 모둠 활동을 준비하느라 친구들을 우리 집으로 데려온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그 앨 보고 "이쁘네!"라고 하셨던 게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물론 저는 어머니께 그 앨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죠.



제가 겉보기에는 천성이 나대길 좋아하는 영락없는 사내아이 같아 그렇지 속으로는 숫기 하나도 없고 부끄러움 잘 타는 애송이였습니다. 누군갈 좋아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끄집어낼 줄 몰랐고, 그런 감정이 생겨도 마음속 창고에 꾹꾹 욱여넣어 자물통을 채웠습니다.



어느 날 학년 전체가 1박 2일로 야영을 떠났습니다. 여자애 대여섯이 야영장에 유성매직을 챙겨 왔네요. 평소에 고무줄 끊고 공깃돌 날름 훔쳐 달아나는 남자애들 얼굴에 잘 지워지지도 않는 유성매직 낙서로 응징할 생각이었나 봅니다. 원래 좋아하는 애한테 더 짓궂게 장난친다고, 그 애의 연두색, 분홍색 공깃돌을 잽싸게 낚아 도망치곤 했습니다. 이쯤 되면 성별로 편이 갈린 셈인데, 교편 잡은 지 아직 얼마 안 된 새내기 교사인 담임 선생님도 여자라며 유성매직을 조용히 건네받았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무릎을 베고 자고 있던 성호의 이마에 두 줄을 쫙쫙 그었습니다. 가엾은 성호가 화들짝 놀라 이마를 어루만져보지만, 성호의 백만 불짜리 뽀얀 이마에는 두 이(二) 자가 선명하게 생겼고, 선생님을 믿었건만 마른하늘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라는 듯 성호는 그만 울상을 짓고 맙니다.



꽃피는 봄날이라지만 야영장 날씨는 여전히 제법 쌀쌀했어요. 야외 수돗가가 있지만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만 조금씩 찔끔찔끔 흘러나왔죠. 비누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하고요. 이런 곳에서 유성매직 낙서를 당했다간 집에 갈 때까지 못 지울 게 뻔하죠. 당연히 남자애들은 성호처럼 되지 않으려고, 유성매직을 손에 쥔 여자애들을 요리조리 피해 다녔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도망 다녔는데, 배시시 웃으며 절 향해 다가오는 그 애 앞에서 그만 발이 땅에 붙고 말았습니다. 여왕의 마법에 걸려들어 몸이 얼어붙고 꼼짝달싹 못 하게 된 만화영화 속 주인공 왕자처럼 저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애는 유성매직 뚜껑을 열고 굵직한 펜촉을 제 이마에 대어 긋습니다. 그리고 양쪽 볼때기에 뭐라고 글씨를 쓰는 것 같더니 콧등을 루돌프 사슴코처럼 빨간색으로 칠합니다. 갑자기 다른 여자애 서너 명이 더 달라붙었는데 다들 그동안 저한테 쌓인 게 많은 애들입니다. 이제는 여자애들이 아주 작정하고 덤벼들어 팔뚝이랑 손목에도 마구잡이로 낙서를 이어 나가는데, 유성매직 특유의 매운 잉크 냄새가 코끝을 찌릅니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있고 나서 손거울 속에 비친 제 얼굴을 봤는데, 볼때기에 '바보'라는 큼지막한 글씨도 그렇고 눈뜨고는 도저히 못 봐줄 지경이었습니다.



'왜 도망 안 가고 그 애 손에 붙들렸을까?'



뒤늦게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오네요. 낙서당한 부위가 너무 넓은 데 좀 가렵기도 하고, 보기 흉하기도 하고... 그래서 손가락으로 있는 힘껏 힘주어 세게 박박 문질러도 보고, 손톱으로 살살 긁어보기도 하고 별짓을 다 해봤지만 지워지기는커녕 피부만 벌게져 아프기만 합니다. 저를 이 꼴로 만든 계집애들을 찾아가 이제 재미없으니 이걸 좀 지워달라고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매달렸지만, 그네들은 흡족하다는 듯 유성매직을 흔들면서 "이거 안 지워지는 거 몰랐니 호호호"라고 연신 히죽거리며 절 놀려대기만 하네요. 결국 야영장에서 돌아올 때까지 그 몰골을 해야 했습니다.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도 웃음이 나와?'


그 애는 제 얼굴을 볼 때마다 너무 웃긴다며 숨넘어갈 듯 계속 깔깔 웃어댑니다.





나중에 중학교에 올라가서 청소년 수련원에서 같은 국민학교 나온 친구들이랑 만나 조교들 몰래 노닥거리며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그러다 진실게임을 하게 되었는데 그 앨 좋아했다는 진심조심스럽게 털어놓고 말았습니다. 그랬더니 친구들은 "야 너 걜 좋아했어?" "걔가 참하다고?"라고 빈정거렸습니다.


"지금도 걜 좋아하냐?"


"응..."


그 애는 여고에 진학했다던데, 고등학교 1학년 때였나 2학년 때였나 동네 인근 공원을 가로질러 지나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게 마지막이었습니다. 대학에 진학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싸이월드 일촌을 그 애와 맺게 되었는데, 군대 외박 나와서 피시방에서 그 애 방명록에 푼수같이 실없는 안부 인사나 끄적이곤 했습니다.


적막한 밤, 위병소에는 풀벌레 소리만 나지막이 들려옵니다. 


"넌 어찌 된 인간이 살면서 애인도 하나 못 만들었냐? 좋아하는 여자도 없었냐?"


같이 근무 서는 선임병의 갈굼 아닌 갈굼에 그 애 이야기를 몇 번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멍청한 놈을 봤나. 거시기 좋으면 좋다고 얘기를 해야 상대방이 알지 인마. 그러다 다른 남자가 걔를 낚아채 가버리면 어쩔 거야. 형이 좀 가르쳐줄까?"


위병소 근무 때마다 억지로 받게 된 '연애 개인지도'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습니다. 숫기 없는 애송이라서 그랬을까요? 그런데 전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껏 경험해 본 적 없는 초대형 태풍이 제 마음에 몰아닥쳤고, 서울로 올라와 백화점 점원으로 취직했다는 그 형에게 진심으로 개인지도를 청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태풍은 그 애가 일으킨 게 아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앨 향한 제 감정은 한 점 티 없이 맑고 순수했던 학창 시절에, 한 아이를 향한 좋아한다는 감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겁니다. 제 마음속 애와 저는 어른으로 성장을 멈추고 그때 그 국민학교 교실에 영원히 머물러 있으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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