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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Jun 27. 2024

차라리 오타쿠(おたく)가 되어 볼 걸 그랬어요

일찍 수건 던진 수학포기자

막판에 진로가 문과(文科)로 결정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문과로 갈지 이과로 갈지 정하라는 데, 그 중요한 선택지 앞에 단 며칠만 주어졌습니다. 물론 저는 주저 없이 문과를 택했죠. 그런데 아버지께서 저의 문과 선택에 극구 반대하셨습니다. 자식 교육 문제를 어머니에게 맡겨놓고 크게 관여하지 않으셨던 아버지이지만 이번만큼은 완고해 보였습니다. 문과로 가버리면 나중에 취직할 때 길이 좁아진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수학에 자신감을 완전히 잃어버린 저는 애당초부터 이과로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공통수학에서도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데 난도가 더 높은 수학 2까지 배워야 하는 이과 공부라뇨.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계열 신청란에 마지못해 이과를 적었습니다. 하지만 신청서를 학교에 제출하는 날, 어머니의 집요한 설득 작전에 아버지께서 넘어가셨고 그 덕분에 제가 문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수학 못 하는 애를 억지로 이과에 집어넣었다가 일류 대학은커녕 '인서울(서울 소재 4년제 대학교 진학)'도 못하는 건 아녜요?"


어머니의 노심초사(勞心焦思) 자식 걱정이 마를 날 없었던 겁니다.





원수 같은 수학이 제 발목을 잡기 시작한 건 중학교 3학년쯤입니다. 연합고사라고 불렸던 고입선발고사를 앞두고 모의고사를 달마다 치렀습니다. 반에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류인근. 이미 고등학교 수학까지 다 떼고 온 괴물이라는 둥 한성과학고를 노리고 있다는 둥 소문이 무성했죠. 걔를 몇 단계 위 체급 거인 취급하며 다들 2등을 현실적인 목표로 삼는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3등과 4등 사이를 오갔는데 매번 수학에서 점수를 많이 까먹다 보니 2등 추격이 쉽지 않았습니다. 사실 어머니께서는 저를 외고에 보내려고 나름 준비를 하셨다는데 갈수록 쳐지는 제 수학 성적 때문에 결국 단념하시고야 말았죠.



그러다 실전을 두어 달 앞두고 수학이 유독 쉽게 출제되었던 모의고사를 만났습니다. 물 수학에 힘 받은 저는 처음으로 2등 자리에 앉아봤고 그때 류인근과의 총점 차이는 단 2점에 불과했죠. 하지만 12월 12일, 실전의 수학은 엄동설한(嚴冬雪寒)을 녹이는 불 수학이었고, 저는 매서운 수학 맛에 당황한 나머지 평소 잘하는 과목에서도 '꽈당'하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한 번도 떨어져 본 적 없는 8등까지 쭉 미끄러졌습니다.



고등학교라는 본격적인 입시 경쟁의 링 안으로 들어와서는 수학 앞에 일찍 무릎을 꿇고 수건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수리 영역에서는 반타작이나 하면 다행이었죠. 삼 년 내내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수학만 빼면 서울대까진 아니더라도 연고대는 충분히 노려볼 정도로 높은 점수가 계속 나오는 데 수학에서 물을 잔뜩 먹어버리니까 어머니께서는 제게 값비싼 수학 개인 과외를 수능시험 날까지 계속 붙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제 수학 성적은 늘 제자리걸음이었습니다. 집에서 기대하는 대학교의 수준은 이만큼 높은 데, 현실적으로 제가 도달할 수 있는 높이는 언제나 한참 아래였습니다.




제 마음가짐에도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집에서 그만큼 뒷바라지를 해주면 노력하는 시늉이라도 보여야 사람인데, 싫증이 난 수학을 제쳐두고 좋아하는 과목만 골라 공부했습니다. 수학은 포기하고 나머지 과목에서 가능한 높은 점수를 얻어서 '인서울' 사학과(史學科)나 외국어 학과에 들어가겠다는 것이 제 짱구에서 나온 얕은 생각이었습니다. 개인종합 종목에 출전하는 기계체조 선수가 "나는 도마를 잘하는 데 평행봉은 점수가 잘 안 나와서 싫다"라고 하면서 그걸 포기하면 어디 올림픽 근처라도 갈 수 있던가요? 평소 역사 과목을 좋아했기에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도 수학 문제집 푸는 대신 역사책을 읽었고, 수능에서 배점 비중이 매우 낮은 세계사 과목 문제집을 붙잡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서가에 빼곡히 꽂힌 책들 사이에서 코흘리개 시절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초한지(楚漢志) 같은 역사 소설을 하나둘씩 골라내었고, 장사꾼 여불위가 출세하려고 장양왕에게 바쳤다는 애첩 조희(趙姬)의 미모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푹 빠져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다음날 학교에 가져가기까지 했죠. 이때 소설 읽는 재미를 들이게 되었는데, 문학 교과서에 감질나게 토막글로만 실린 이야기의 나머지 전개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럴 때면 저녁에 수학 과외에 가는 길, 자주 가서 단골이 된 도서 대여점에 잠깐 들러 책을 빌려 오곤 했습니다. 그곳에도 없으면 문제집 사라고 받은 돈으로 서점에 가서 사보기도 했죠.



고교 시절 가장 좋아했던 액스 재팬(X-Japan)의 포에버러브(Forever Love)



일본 대중문화가 아직 개방되지 않았던 시절, 친구들끼리 CD를 구워 돌려 듣던 엑스 재팬(X-Japan)이라는 록밴드 노래에 귀가 열리게 되면서 저는 일본어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제가 수학과 성큼성큼 큰 발걸음으로 멀어지는 계기가 됩니다. 커다랗고 푸른 눈망울을 한 가상의 소녀와 짝사랑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오타쿠(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집착하는 사람)가 된 건 절대 아니었지만, 예전에는 읽을 수 없어 암호 같았던 히라가나가 이제 읽히는 마법 같은 일 자체가 즐거웠습니다. 게다가 일본어가 우리말과 어순이 같아서 신기했죠. 구깃구깃한 쌈짓돈 모아 진명출판사에서 나온 일본어 교본을 구했고, 자율학습 시간에 공책에 히라가나를 그렸습니다. 오타쿠였다면 딱딱한 교본이 아니라 '오! 나의 여신님(ああっ女神さまっ)'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일본어를 배웠겠죠. 차라리 그때 그런 걸로 일본어를 배울 걸 그랬습니다. 그랬더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일본어 하나라도 밥벌이하는 데 써먹을 만큼 유창하게 구사할 때까지 흥미를 잃지 않고 계속 연마했을 텐데요.




어느 날 머리에 뜨끔한 꿀밤이 하나 떨어졌습니다.


"그럴 시간에 수학 문제나 하나 더 풀어라. 그런 건 우선 좋은 대학에 가고 나서 해도 안 늦어. 넌 싫은 건 해보지도 않고 끝까지 싫은 게지?"


마침 담임 선생님은 수학 선생님이셨는데, 오랜 교직 생활로 저 같은 학생을 한 트럭은 족히 다뤄봤을 겁니다. 선생님께서는 저한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단박에 꿰뚫어 보셨죠. 하지만 선생님의 애정 어린 훈계도 제 귀엔 소귀에 경 읽기였고, 저는 더욱더 집요하게 일본어 공부에 파고들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단한 일본어 문장을 읽고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섰고 한 단계 더 높은 교재가 필요해졌습니다. 동네 서점에서는 그런 교재를 구할 수 없어서 일요일에 시내버스를 타고 당시 수원 최고 번화가였던 남문에 나갔고, 이 층짜리 큰 서점에서 중급 일본어 강독 교본과 한자 읽기 사전을 구해왔습니다.



드디어 수능에 제2외국어가 들어왔는데, 저는 이걸 일본어 공부를 정당화하는 알량한 핑곗거리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제2외국어를 정시에 반영하겠다고 발표한 대학은 가물에 콩 나듯 드물었고 그마저도 제2외국어가 당락을 좌우하는 요소는 아니었죠. 게다가 우리 학교에서는 제2외국어로 독일어나 중국어를 선택해 배우고 있었습니다. 수능 모의고사 때 저를 포함하여 전교에서 딱 두세 명만 일본어를 선택했고, 그 바람에 시험 감독하시는 선생님께서는 번거롭게 일본어 시험지를 따로 챙겨놔야 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일본어에서 매번 만점을 받은 덕분에 괜한 짓으로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든다는 꾸중은 듣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그런 말 안 나오게 하려고 일본어를 더 독하게 팠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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