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준영 Jul 03. 2024

수능 점수 인플레이션

한국외대 진학의 희망을 접고

이제 막 시험이 끝났는데 해설지를 파는 잡상인들은 학부모 틈바구니에 끼어 목청을 높여가며 하루 장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채점을 하고 싶지 습니다. 마치 오늘 단 하루만을 위해 십이 년간이나 질질 끌어온 학창 시절의 종말(終末)아무런 생각 없이 멍하니 침대에 누워서 정리하려고요. 다음날 학교에 가면 분명 사전 채점 결과를 적어내라고 할 텐데, 태평스럽게 앉아 있는 저를 보고 담임 선생님께서는 끝까지 속 썩인다고 혀를 끌끌 차며 나무라실 게 틀림없습니다. 아마도 교무실에서 해설지를 하나 가져와 제 손에 쥐여주면서 지금이라도 당장 채점해서 예상 점수를 적어내라고 닦달하시겠죠.


'예, 저는 그럴 작정입니다. 그냥 교실에서 하겠다고요. 하루 늦게 확인한다고 해서 어디가 덧나는 건 아니잖아요?'



길섶에서 짙게 익은 적갈색 낙엽을 주웠습니다. 삼 년 전 이곳에서 고입 연합고사를 치르고 고사장을 나설 때, 저는 볼품없는 작은 돌멩이를 하나 주웠습니다. 그걸 책상 위에 올려놓고 속으로 말을 걸곤 했죠. 다행히도 제 책상을 청소하시는 어머니가 이게 웬 흉물이냐며 돌멩이를 버리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냥 눈에 띄지 않았을 수도 있고, 수석(壽石) 모으는 게 취미였던 아버지 덕분에 집안에 돌멩이가 원체 많아서 그러려니 했을지도 모릅니다. 돌멩이는 사라졌지만, 그때 그 낙엽은 아직도 사진첩 어딘가에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 저기 어머니가 보입니다. 성민이도 따라 나왔네요. 곧 중학교를 졸업할 쟤가 형의 입시 경쟁 바통을 넘겨받겠죠. 어머니 손에는 해설지가 들려있습니다.




제가 수능 시험을 치를 즈음 우리 집안 분위기는 조금 어수선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오랜 공직 생활을 정리하고 사업을 준비하고 계셨거든요. 불과 몇 해 전에 찾아온 IMF 금융 위기를 남의 일처럼 넘길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의 철밥통 공무원 신분 덕분이었는데, 이제 집안의 명운이 아버지의 사무실에 달리는 셈이라 어머니께서도 수험생 뒷바라지에만 정신을 붙들어 맬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사실 수능 시험 날에도 아버지 사무실 자리를 알아보느라 분주하셨을 겁니다. 성민이가 "엄마, 형아, 지금쯤이면 시험 끝나가겠지?"고 계속 물어대며 재촉하는 에 어머니도 시험장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떼셨다고 합니다. 동생은 말로 표현 안 해서 그렇지, 저를 많이 사랑하고 있었던 겁니다. 참 기특한 녀석이죠? 얼마 전 제수씨가 건강한 아이를 낳아서 제가 드디어 큰아버지가 되었답니다. '큰'이라는 꾸밈말이 붙긴 했어도, 아버지라는 말에 적잖은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저는 홀로 골방에 들어앉았습니다. 방문을 안에서 걸어 잠갔습니다. 뜨끈뜨끈하게 데워놓은 바닥에는 어머니가 잡상인한테 산 그 꼴 보기 싫은 해설지가 옆에 있습니다. 시험지를 고사장 밖으로 가지고 나올 수 없기 때문에 OMR 카드에 정답을 마킹하면서 사전 채점을 위해 수험표 뒷면에 정답을 그대로 표시하던 시절이었죠. 그런데 해설지만 봐도 제가 몇 번을 찍었는지 죄다 기억나더라고요. 적어도 시간이 없어서 허둥지둥 아무거나 찍지는 않았단 소리겠죠?



언어 영역부터 채점을 해나갑니다. 2교시 수리 영역을 건너뛰고 사회탐구와 과학탐구, 그리고 외국어 영역 순으로 채점할 생각입니다. 시험 칠 때는 별로 떨리지 않았는데 해설지에 해답이랑 수험표 뒷면에 적어 놓은 번호랑 맞추는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입니다. 언어 영역은 다 맞았고, 3교시에서는 과학탐구에서 3점짜리 물리 문제 하나만 놓쳤습니다. 과학탐구가 큰 변수였는데 하나만 틀렸다니 대성공입니다. 외국어 영역이랑 제2외국어 일본어는 실전에서도 만점입니다. 이대로라면 서울대 갈 성적 아닙니까? 하지만 좋아하기엔 이릅니다. 원수 같은 수학이 남았거든요. 밖에서 채점 다 했냐고 묻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저는 풀이 잔뜩 죽어 방문을 열고 나옵니다. 총점에 포함되지 않은 일본어를 제외하고, 사백 점 만점에 357점을 받았습니다. 네, 수학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반타작한 겁니다. 무려 40점을 잃었죠. 어머니는 총점만 듣고 제가 외대에 충분히 가겠다며 좋아하셨죠.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시험장에서는 정신없이 문제를 푸느라 잘 몰랐지만, 이번 수능이 역대급 '물 수능'이었다는 사실을 골방에서 채점하면서 깨달았거든요.



어머니는 서울대에 세 번째 도전장을 내밀면서 저랑 같은 해에 또 수능을 보게 된 수험생을 둔 작은아버지 댁에 먼저 전화를 걸었고, 또 다른 지인들과 전화통을 붙잡고 한참 이야기를 나눈 끝에 뭐가 문제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다들 평소 모의고사 때보다 큰 폭으로 더 높은 점수를 받는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습니다. 수능에서 만점을 받으면 방송에 출연하여 신상정보가 박제될 정도로 만점자가 귀했던 시절인데, 2001년도 수능에서는 만점자가 무려 60명이나 넘게 나왔습니다.



다음날 학교에 가보니 평소 모의고사에서 저랑 점수 차이가 20점씩 났던 세준이의 점수가 저와 거의 비슷했습니다. 알고 보니 쉽게 출제된 수리 영역에서 점수를 많이 올렸더군요. 수학을 끝까지 열심히 공부한 친구들은 쉬운 문제들을 맞혀서 점수를 쓸어 담았습니다. 하지만 수학을 처음부터 포기했던 저는 그 문제들을 놓치고 말았던 거죠.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무슨 소용이랍니까? 얼마 후 성적표가 날아왔는데, 전국 백분위가 12%로 떨어졌습니다. 한국외대는 날아갔습니다. 한국외대 네덜란드어과가 상향 지원이다 아니다를 따질 것도 없이, 전국 백분위 10% 안에 들어야 하는 한국외대 특차 지원 자격마저도 사라졌죠. 아시죠? 특차에 목숨 걸었던 저는 재수(再修)가 없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