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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Jul 01. 2024

내게 마지막 하나 남았던 대입(大入) 카드

특차전형

땀내가 진동하는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선풍기는 이제 무더위에 지칠 법도 한데 털털거리면서도 군말 없이 날개를 돌립니다. 아예 웃통을 벗어젖혀 러닝셔츠 바람으로 참고서와 씨름하는 아이들이 간간이 눈에 띕니다. 남녀 분반인 데다 학년 전체에 여선생님이 한 분도 안 계셨거든요. 수능이 반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말이 좋아 자율학습이지 아이들은 강제로 주말까지 반납하고 에어컨 없는 교실에 앉아 땀을 뻘뻘 흘립니다. 평소 엄하기로 소문난 학년주임 선생님도 그런 아이들을 긍휼히 여겼는지 그 정도 복장 불량에 자애롭게 눈감아주십니다.



지난주 치른 모의고사 결과를 기준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전라도 남원에 있는 서남대학교까지 대학교와 전공 서열을 깨알 같은 글씨로 정리해 놓은 대자보가 칠판 옆에 붙었습니다. 총점 단 몇 점 차이로 학교와 전공이 갈리니까 한시라도 게으름 피울 생각 말고 정신 줄 부여잡고 공부하라는 무언(無言)의 압박이죠. 본격적인 진학 지도에 앞서, 가고 싶은 대학과 전공을 적어내라고 하네요.



문이과 통틀어 전교 1등이자 우리 반 1등인 영규가 서울대학교를 적어 내는 건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영규는 시커먼 법복이 제 몸에 어울리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당시 문과생들의 출셋길로 통했던 법학과가 아니라 경영학과를 적어 놓은 게 아니겠습니까? 하긴 그 까불이 녀석이 판검사가 된다는 게 웃기긴 합니다. 교실 뒤편에 웅크리고 앉아 대학 진학은 나 몰라라 수업 시간 내내 퍼질러 자기나 하고, 선생님 몰래 화장실에서 구름 과자를 뻐끔뻐끔 피워댔던 껄렁껄렁하고 거친 애들하고도 영규는 스스럼없이 잘 어울렸습니다. 한마디로 발라당 까진 우등생이었죠. 교실을 집고 다니며 호구조사를 해대더니 제가 적어놓은 걸 쓱 한번 봅니다.




"야야, 준영이 거 봐봐. 이거 대박이야."


1 지망 : 한국외대 네덜란드어과

2 지망 : 경희대 스페인어과

3 지:...



저는 수학이 싫어서 상경 계열 진학은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았고, 외국어과에 가겠다고 일찌감치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외국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한국외대를 점찍어 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문과 입시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한국외대는 이십여 년 전에도 수학을 갖다 버린 수험생이 합격하기엔 꽤 버거운 학교였죠. 특히 한국외대 일본어과는 수학을 간신히 반타작하는 저 같은 수험생이 언어, 외국어(영어), 사회과학탐구 영역에서 온 힘을 다해 만점을 맞더라도 결코 노릴 수 없는 서열표 상단에 자리했습니다. 하지만 이란어과, 아랍어과, 포르투갈어과, 네덜란드어과 같은 중하위권 전공은 저의 모의고사 점수보다 두세 점 더 위쪽에 포진하여 탐낼 만했죠.



하지만 담임 선생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제가 내신 성적 관리를 개판으로 했기 때문에 특차 외에는 수도권 대학 진학 기회가 없었습니다. 특차란 2001년도 대입(大入)을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입시 제도인데, 특차 전형에서 대학은 고교 내신 성적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오로지 수능 점수로만 학생을 선발했습니다. 언뜻 들으면 정말 솔깃한 기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특차 전형에서는 복수 지원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카드가 딱 한 장뿐인 셈이죠. 그러니 특차 외엔 답 없는 저 같은 수험생이 괜스레 욕심만 앞세워 상향 지원을 했다가 마지막 특차 열차를 놓쳐버리면, 재수하더라도 수도권으로 올라오기가 매우 어렵게 됩니다.



제가 만약 그해 특차 전형에서 낙방했다면, 대학 진학은 잠시 접어두고 어차피 가야 하는 군대를 빨리 다녀오는 편을 택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얼굴이 삭아 버린 N수생이 되면 '비교내신'이 적용될 테니 말이죠. 그래서 담임 선생님은 진학 상담 때마다 외국어대학이 있는 경희대 수원캠퍼스(現 국제캠퍼스)로의 하향 지원을 제게 늘 권하셨습니다. 경희대 수원캠퍼스가 하향 지원이라는 것도, 제가 실전에서 모의고사만큼 점수가 나와줬을 때나 통하는 말이라는 일침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형편없는 제 수리 영역 점수는 안 봐도 뻔한 상수(常數)이지만 사회과학탐구 영역, 특히 과학탐구 점수는 큰 변수(變數)이니, 선생님께서는 단국대 천안캠퍼스 정도를 제가 노려볼 만한 현실적인 목표로 삼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필 왜 네덜란드어과를 골랐던 걸까요?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프랑스 월드컵이 열렸습니다. 히스패닉 가수 리키 마틴이 콧대 높은 프랑스어가 아닌 스페인어로 주제가를 불렀고, 우리나라의 조별리그 첫 경기 멕시코 전에서 하석주 선수가 한국 축구 사상 최초로 선제골을 넣었지만 얼마 후 백태클 반칙으로 퇴장을 당해 온 국민을 들었다 놨던 그 프랑스 월드컵 말입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끌었던 네덜란드는 우리나라를 시작부터 몰아세우며 오 대 영으로 짓밟았는데, 저는 네덜란드 축구에 매료된 나머지 그들의 유니폼 빛깔인 오렌지 물결에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체육복에 네덜란드 축구 선수 이름을 적었고, 칠판에 오렌지 빛깔을 닮은 분필로 '100% 오렌지'라는 네덜란드 응원단이 내거는 표어를 적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고3 여름,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공동 개최로 유로(EURO) 2000 축구대회가 막을 올렸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희망하는 대학교와 전공을 적어내라고 하니까, 제 모의고사 성적과 얼추 맞아 보였던 한국외대 네덜란드어과를 써낸 겁니다.



"그런데 네덜란드어는 네덜란드에서만 쓰는 말 아니냐? 그게 배워서 얻다 써먹게? 아, 그거 배워서 베르캄프랑 이야기하면 되겠네. 흐흐."



"무식하면 좀 가만히 있으라고. 네덜란드어는 벨기에에서도 쓰이지. 플랜더스의 개 알지? 거기가 네덜란드어를 쓰는 곳이야. 그리고 수리남 같은 나라는 옛날에 네덜란드 식민지였고. 클뤼베르트, 다비드 같은 혼혈 선수들이 원래 수리남 출신인 것도 모르지?"


저는 가소롭게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전교 1등 에서 무식이라는 단어를 툭툭 내질러가며 잽을 날렸습니다. 그러자 영규는 한심하다는 듯 서열표 한참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반격합니다.


"그딴 거 많이 알아서 퍽이나 좋겠네. 그러지 말고 그냥 아프리카어과에가지 그래."


"그래 너 거기 가면 딱 어울리겠다."


시시콜콜한 일로 날마다 티격태격 다투는 짝꿍 세준이가 옆에서 영규를 거들더니 토인(土人) 흉내까지 내며 약을 바짝 올립니다.



당시에는 한국외대 용인캠퍼스(現 글로벌캠퍼스)에 소재한 아프리카학부를 '아프리칸스어과'라고 표기한 입시 안내서가 있었습니다. 세준이는 아프리칸스(Afrikaans)어가 흑인 토착민이 쓰는 언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저도 그때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프리칸스어는 17세기 무렵에 남아공, 나미비아, 짐바브웨 등지로 건너와 제국주의 지배자가 된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인 후손을 일컫는 아프리카너(Afrikaners)와, 주로 백인 남성과 유색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나 이등 시민 취급을 받았던 혼혈인(Kleurlinge)들이 주로 사용한 유럽 언어였던 겁니다. 아프리칸스어는 네덜란드어를 꼭 빼어 닮았는데, 남아공의 지독한 인종차별 정책을 지칭하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도 아프리칸스어로 '분리'라는 뜻입니다.



훗날 제가 인도네시아 대학교(Universitas Indonesia) 중앙도서관의 어두침침한 열람실에서 혼자 네덜란드어를 익히게 되는데, 당시 우리나라 언론에서 클뤼베르트라고 적었던 곱슬머리 골잡이 이름은 클라위버르트(Kluivert)라고 읽혀야 하고, 베르캄프의 이름 철자에는 한국인이 발음하기 무척 까다로운 g가 들어가서 원래는 베르흐캄프(Bergkamp)로 적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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