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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Jul 06. 2024

"엄마, 나 꼭 외대 편입할게"

지키지도 않을 약속

어쩌다 무악재 고갯길을 넘을 때 저는 그날 어머니와의 서울 나들이를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당시에는 수원에서 서울 가는 길이 그리 넓지 않았습니다. 한남대교를 넘어 서울역까지 편히 데려다주는 M자 붙는 광역급행버스도 없었고, 법원사거리에서 아주대를 거쳐 사당역으로 가는 7000번 버스가 이제 막 개통됐지요. 무악재 넘어 홍제천 따라가는 낯선 여정을 서울 지리에 어두운 모자(母子)가 가장 빨리 완수하는 길은 경부선 철도 하나뿐이었습니다. 상행선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은 건 어머니도 그때가 처음이었을지 모릅니다. 오래간만에 여행의 흥취를 한껏 부려볼 법도 한데 모자는 열차가 영등포역에 멈춰 설 때까지 별말 없이 잠자코 앉아 있습니다. 아들의 책가방에는 돌덩이보다 더 무거운 대입 특차전형 원서가 들었습니다.





수능 성적표가 나오자마자 저는 부랴부랴 특차전형 원서를 써야 했습니다. 내신 관리를 하지 않은 저에게 수능 점수와 내신을 합산하는 정시 전형은 의미가 없었고, 어머니의 열두 해 자식 교육 농사는 속전속결로 특차에서 판가름 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경희대 수원캠퍼스 스페인어과에 원서를 내는 줄로 알고 서점에서 표지 삽화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들어간 스페인어 문법 교재를 구해서 맛 좀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식을 서울로 올려보내야 한다는 어머니의 의지가 강해서 남가좌동에 있는 명지대학교 인문계열에 특차원서를 집어넣게 됩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제가 아랍어과에 원서를 낸 걸로 알고 계시는데, 사실 당시 명지대학교 특차전형은 계열별로 진행됐고 2학년 때 전공을 결정했습니다. 아랍지역학과는 인문대학에 속한 전공 중 하나였죠. 제가 아랍어를 배우고 싶다며 떼를 쓰는 바람에 제 점수로 충분히 넣어봄 직한 홍익대, 건국대를 건너뛰고 명지대학교를 선택한 거니 어머니가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지요.




"회수권 없어진 지가 언젠데 그걸 지금 찾고 그려. 그냥 현금 내고 타슈."


서울 아줌마들은 어찌나 퉁명스럽던지요. 저희 모자는 열차에서 내려 시내버스로 갈아타려고 회수권을 좀 사려했는데 가판대에 앉은 아줌마한테 촌놈 취급을 받고 괜스레 무안해집니다. 서울 생활이 앞으로 이러려니 하면서 명지대 가는 길을 그 표독스러운 가판대 주인아줌마한테 물어 버스에 오릅니다. 버스가 독립문을 지나칠 무렵 신호를 받고 교차로에 멈춰 섰는데 연세대학교로 가려면 성산로로 좌회전하라는 교통 표지판이 보입니다.


"우리 아들이 연세대를 못 가면 도대체 누가 가나 했다."


버스가 그대로 교차로를 뚫고 북행(北行)하여 고갯길을 오르자, 자식을 연세대에라도 보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는지 어머니께서 탄식을 쏟아냅니다. 연세대도 마다하고 삼수에 도전한 끝에 기어코 서울대 공대 합격권 점수를 받았다는 이종사촌의 소식을 들은 터라 심경이 더 복잡하셨을 겁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그만큼 영특한 아이였다고 자부하셨거든요. 예전엔 서울 어디 붙었는지도 몰랐던 명지대가 얼마나 멀던지요. 버스가 고갯길 넘어 허름해 보이는 유진상가를 만나 홍제천 따라 연희로로 좌회전해서도 한참을 더 가야 나옵디다. 도착해 보니 교정이라 할 만한 게 없을 정도로 비좁았습니다. 언덕배기를 올라 원서를 접수처에 던져놓고 나오듯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학교를 직접 눈으로 보고 나서 실망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진 어머니를 곁눈질로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저는 버스가 다시 무악재 고갯길을 오르는 순간에 어머니 손을 살포시 쥐고 "엄마, 외대에 꼭 편입할게"라고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 말이 어머니께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을까요? 저는 그때 날린 부도수표(不渡手票)를 여전히 갚지 못하고 있다가 마흔 살 넘은 늦깎이 대학원생이 되어 외대 강의실에 앉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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