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여름날을 보내며

by 이주희

이번 여름 방학은 정말 알차게 꽉 채워 보냈다.
방학이지만 우리 반 부진 학생들을 가르치러 학교에 나갔다.

부장님께서

"안 되는 애들은 이유가 있어서 안 되는 건데..."

라며 시작 전부터 내 기를 팍 꺾어놓으셨지만, 막상 2주간 매일 가르쳐보니 반은 맞는 얘기고 반은 틀린 얘기더라.

구구단은 남학생보다 여학생 두 명이 훨씬 더 잘 안되었다. 하나 계산하려 구구단을 전부 다 적어서 더디게 풀고 있는, 그리고 그렇게 해서 틀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안쓰러우면서도 답답함이 올라왔다.

그에 비해 국어가 특히 부족한 남학생도 있다. 생각하며 읽다 보면 충분히 풀 수 있는 문제인데, 눈은 읽고 있어도 마음은 딴 데 가있는지 도통 내용을 파악하려는 의욕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답지에는 늘 딴 소리를 적었다.

그래도 무더운 여름날, 가르치는 나도 그렇지만 아이들도 공부하겠다고 자발적으로 잘 출석했다. 이만하면 이 프로그램은 성공적이었다 해도 되겠지.

평정심을 유지하려 무지 애를 썼음에도 불쑥불쑥 답답함에 언성을 높인 때를 생각하면 그 학생에게 미안해진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잘 풀었을 때,

"잘했어!"

라는 멘트를 잊지 않았다. 그것보다 더 효과적인 미사여구가 뭔가 있을 것 같은데, 생각이 잘 나지 않아 늘 똑같이 저 멘트다.




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오후에는 법원에 가서 부모 상담을 받았다. 임시 양육권 결정에 대해 항고 신청을 하고, 최선을 다해 추가 서면을 준비했다. 오늘은 직접 교육청에 불려 가 징계위 출석 통지서를 받아왔다.


참으로 뜨거운 여름이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일요일, 꿈에 그리던 두 딸과의 첫 면접 기일이 잡혔다. 전남편은 갖가지 이유를 대며 끝까지 아이들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지만, 노련한 조사관의 구슬림에 넘어갔다. 그녀가 전남편에게 '이렇게 굴면 결국 너에게 불리하다'라는 사인을 줬기 때문이다.

1년 만에 두 딸을 만난 엄마의 멘트로 어떤 게 적절할까?

"보고 싶었어."

"엄마 없이 별일 없었니? 엄마 이렇게 오랫동안 보지도 못하고 어떻게 지냈어? 우리 딸 다 컸네?"

다섯 살 난 두 딸이 그러면 뭐라고 대답할까.


헤어질 때는 물론

"사랑해."

"우리 곧 또 보자."

라고 해야 할까? 아, 마지막 말은 너무 가슴 아플 것 같다.




작년 9월에 소송을 제기한 지 만 1년이 다 되었다.

지금 딱 소송 중간 지점을 지나며 가정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여성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나도 중간중간, 경찰서에 불려 가 피의자 신문 조사를 당하는 등, 소송이란 게 뼈저리게 아프게 다가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세상엔 이보다 훨씬 심각한 가정 폭력이 아주 많다는 것을.

실제로 2018년에 잠실 가정폭력 상담소에서 집단 상담을 받을 때 그랬다. 내 사정은 심각한 축에 끼지도 못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가정 폭력의 그늘에 놓인 여성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아무리 소송 과정이 힘들더라도

거기서 꼭 걸어 나오시라고.


우리, 그렇게 크지 않았잖아요?
우리, 정말 귀하게 컸잖아요.
누구도 당신에게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엄마의 굴레?
내가 있고 나서 내가 엄마 노릇을 하는 거 아닌가요?
내 영혼이 병들어가는데
집에 무기력하게 자리 지키고 있는다고 그 인간이 나아지나요?
아니요. 나아지지 않는 그 자는 괴물입니다.
도망쳐야 합니다.
우선 당신부터 살고 보세요.
그 속에 갇혀 영혼을 죽이기엔 세상에 남은 날이 너무 깁니다.
아껴주세요.
이 세상 누구보다 나를 아껴주세요.
반복되는 폭력은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그놈과 헤어지는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할지라도
같이 살며 괴로워하던 때보다 떨어져 있는 이 시간이
제게는 정말 몇만 배, 몇십만 배 나으니까요.
그러니까 힘을 내서
꼭 거기서 걸어 나오시길.
세상에 아직 이렇게 아름다운 빛이 있음을,
여기 나오셔서 꼭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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