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신화 속 불행에 관하여
몇년 전, 지독한 우울증으로 인해, 1개월도 되지 않는 시간만에 8킬로그램이 빠진 적이 있다. 몸이 약해지니 마음도 자연스럽게 더 약해졌는데, 이런걸 두고 고난이라고 할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육체적 고난이든, 정신적 고난이든, 고난은 우리의 지방을 뺏어가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런 류는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살면서 어떻게든 ‘불행’이란 것을 반드시 경험하게 된다.
나는 어려서부터 양가쪽 모두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서, 불행이나, 고난 등의 개념에 익숙했다. 인간은 아담과 하와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그 죄에 대한 대가인 고통을 치루고 있다고 말이다. 어렸을 당시 나는 그게 뜬 구름 잡는 소린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같은 반 친구들을 때리고 다니며 마치 학교라는 사회에서 왕처럼 군림하고 다니던 중학생 시절을 지나고, 몸에 밴 양아치 근성을 못 버려 고등학교에서 여러친구들과 싸우고 나서 자퇴 한 이후, 나는 홀로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후 나의 삶에서 불행의 역사는 지속되었다. 국제학교에 전학을 갔지만, 같은 학교 친구들처럼 돈이 많은 집이 아니라, 미국학교에 가지 못했고, 한국 대학 입시 환경은 외국어 전형을 없애버리는 바람에 한국 대학 진학도 할 수 없었다. 남들과 같은 길에 서 있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는 남들과 같은 곳에 속하고 싶었던 청소년기 때는 그게 그렇게 힘들다고 생각했다. 불행이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 절친한 벗처럼 떨어지지 않는 것이란 걸 알았다면 다소 마음 편히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오이디푸스 역시도 신탁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다면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그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애초에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질투하여 어머니를 빼앗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운명은 너무도 참혹하기만 했다. 그것이 인간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사람들은 오이디푸스가 저질이다라는 생각보다는 안타깝다는 동정의 감정을 느끼곤 한다. 영화 <올드보이>에 오대수가 자신도 모르게 딸과 관계를 하고 이 사실을 알아냈을 때, 괴로워하는 그를 보며, 사람들이 역겹다는 생각보단, 참 잔인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오이디푸스에서 나왔다) 이유는 단순하다. 오이디푸스가 고의적으로 저지른 일이 아닐 뿐더러,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고통에 힘겨워한다. 고통 속에서도 그는 도의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자신을 벌하기도 했다. 누가 그런 그를 손가락질 하고 비난할 수 있겠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이 이야기가 마스터플롯으로 쓰였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여전히 이 이야기는 많은 이야기들의 모티브가 되고 이를 모티브로 쓴 이야기를 들을 때, 사람들은 여전히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마치 인간이 기원전부터 이 이야기를 들으면 전율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것처럼 말이다.
사실 사람들이 프로그래밍 되었다는 표현보다는 인간의 삶이란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본질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저마다의 불행 속에서 살며, 불행을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한다. 오이디푸스의 경우 그는 좀 더 극적인 불행 속에서 산 인물이었지만, 그 정도가 아니어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불행을 가지고 있다. 이 불행은 인간의 불완전성에서 나오는 것일 것이다. 인간이 완전한 존재라면 불행이란 것이 존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불완전성 속에서 인간은 꿈틀거리며, 발버둥치며 살아나간다. 불행을 통해,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고, 자신의 삶에 무엇이 부족했는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반복된 행운과 복된 생활 속에서는 찾기가 힘들다. 행복은 사실 정체성에 대한 인간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기능을 하기도 하니깐.
그런다고 계속 불행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나도,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감히 모두라고 말하고 싶지만) 행복하고 싶다. 다만, 내가 행복에 매몰되어 내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기만을 바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