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맞이하기에는 너무도 잔인한 겨울
12월 1일, 나는 마치 연례행사처럼 우체국으로 가, 가나가와 현에 위치한 곳으로 선물을 포장해 보냈다. 16년 이후, 5번째 맞는 겨울. 분명 그 날 멀쩡하게 선물을 싸서 4만 얼마를 결제하고, 우체국 직원에게 "요즘도 일본에 EMS 도착하는 데 오래 걸리나요?" 등의 대화를 주고받고, 그렇게 집에 잘 왔는데.
나는 2019년을 대체 어떻게 보낸 것인지.
2019년 2월 말, 3년가량의 연애를 접어두고선 제대로 정신도 차리지 못한 채, 열심히, 바쁘게 살았었다. 영화를 하고, 글을 쓰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또래 영화인들과 느껴가며. 물론 오래가지 않았던 행복이었고, 오래가지 않은 바쁨이었다. 인생에서는 정말로 옳은 밸런스를 찾기가 어려워, 너무 바쁠 때는 '아, 내가 뭔가를 놓치고 살고 있다'라고 여기고, 여유가 생기면, 내 맘의 다락 구석에 처박아놓았던 것들까지 끄집어내기 바빴으니까. 요즘은, 차라리 놓치고 사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후회하더라도 해놓을 것들은 다 해놓고 미래에 후회하는 것이 낫지. 이렇게 살다가는 해놓아야 할 것들도 다 놓쳐버릴 테니. 나는 19년도의 겨울을 어떻게 버틴 것인지.
P의 생일은 12월 9일이다. 이제 막 12시가 지나, 4일이 되었으므로, P의 생일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다. 나는 이미 올해 여름부터 P에게 무슨 선물을 보낼까, 고민을 했었다. 이미 P에게 16년 겨울부터 19년 겨울까지 4 개의 목도리를 떠줬기 때문에, 더 이상 P가 목도리를 필요로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나는 바빠졌다. 그 특유의 "내가 뭔가를 놓치고 살고 있어"라는 기분은 불현듯, 내가 정신없이 바쁠 때 찾아오는데, 그러한 "놓치고 있어"의 기분을 느낀 빈도가 굉장히 높았던 여름과 가을이었다. 불현듯, P의 생일선물을 전혀 준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황급히 19년도에 발매된 백예린의 'Every Letter I Sent You'라는 앨범과 유자청을 샀다. P가 겨우 내 찬 바람에 목감기가 걸리지 않기를 바라며, 그리고 찌질한 백예린이 나 대신 영어로 내가 흘리고 싶었던 미련과 찌질을 대신 전해주기를 바라며.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다 싶었는데 (그것도 그럴 것이 작년에는 나도 갖지 못했던 에어팟을 사다 주었다) 다행히도 작년 겨울, 미국에 있었을 때 사놓은 랄프로렌 아우터가 있었다. 사실은 내가 입으려다, 사이즈가 맞지 않아 옷장에 처박아두었던 그 옷. 나는 작년 겨울 나의 생일, P가 보내준 내 생일선물을 정성스럽게 싼 포장지로, 올해 P를 위한 선물을 포장했다. 굉장히 문학적이어 보일 수 있겠지만, 크게 별 의미는 없었다. 미국인인 P는 일본과 한국, 동양국가의 두꺼운 한지 같은 재질의 종이를 굉장히 좋아했고, 나는 인사동까지 가서 그런 종이를 사 올 시간과 여유가 없었다. 그러기엔 난 집에 처박혀 나의 마음에 달라붙은 우울조각들을 귓밥 파내 듯 파내는 것을 더 선호했다. 밖은, 사랑으로 가득하고, 나는 사랑이 고깝게 느껴졌다.
그래도 유리테이프와 중고 포장지로 정성스럽게 싼 백예린의 앨범, 폴로 아우터와 유자청, 그리고 생일 축하 편지와 크리스마스 카드를 박스에 정성스럽게 담았다. 혹시라도 유자청이 새지 않기를 바라며, 뽁뽁이도 수북하게 쑤셔 넣었다. 그 위에는 혹시나 P가 나의 근황을 궁금해할까 싶어 포트폴리오 컬러 인쇄본을 얹었다. 그렇게 박스를 보냈다. 나는 갈 수 없는 일본에, 요코하마에 살지만, 히라쓰카에 가서 내 선물을 받아야 하는 P에게.
사실 요 며칠 새, P가 꿈에 두어 번 찾아왔었다. 어느 날은 갑자기 내게 아이를 낳고 싶다는 말을 했었고, (뭐라고? 내가 갖고 싶다고 했을 때는 멍청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어느 날은 내가 갔던 호텔에 이미 도착해 행복한 시간을 같이 보냈다. P는 행복해 보였고, 나 역시 행복했다. 내게 주어지지 않은 몇 개의 라이프스타일. 그것은 행복이다. 그래서 나는 꿈에서만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런 꿈을 몇 번 꿨다고는 해도, 나는 요 며칠, 잘 지내고 있었다. 여전히 나는 할 일들이 많았다. 참 바빴다. 오늘만 해도, 고작 오후 3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만 보를 걸었다. 아마 불현듯, 유독 P가 못내 지독스럽게 그리운 이유는 오늘의 데이트 때문일 것이다. 오늘 한 미국인과 데이트를 했다. 굉장히 텅 빈 데이트. 서로의 선을 매서울 만큼이나 잘 지키며, 서로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고, 서로의 일상에 침범을 허용하지 않는, 그런 데이트. 곧이어 할 말이 떨어져, 정적이 나와 상대방의 사이를 서서히 잠식할 때쯤, 상대방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 사람은 자신이 속한 곳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이건 내 말투다. "They said they should go back to theirs." 내가 일전에 인스타그램에 올렸었던 한 문장이다. 아무튼 상대방이 집으로 가버리고, 나는 집으로 가던 도중, 음향 감독의 작업실에 들려 내가 찍은 영화의 후반 작업을 구경했다. 크러쉬의 '어떻게 지내'도 부르고 왔다.
집으로 오는 길, 친한 친구와 전화를 하며 입을 털었다. 나의 알 수 없는 우울감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던 중, 꿈에서 본 P 말고 현실의 P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곧, P의 페이스북을 염탐하기에 이르렀다. 나의 본계정은 이미 차단당해, 부계정으로 들어가 볼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굉장히 제한된 정보들의 나열뿐이었다. 나도 알아. 소름 끼치는 거. 근데 근본이 천박한 나는, 고상하게 P의 삶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소셜미디어 안의 P는 왜인지 행복해 보였다. 그것이 소셜미디어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행복해 보이는 P의 삶을 짓밟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항상 일찍 잠에 드는 너는 지금쯤 자고 있을 텐데. 아무런 걱정 없이 편히 잠들었을 텐데. 왜 나는 너에 대한 미련과, 슬픔과, 나를 갉아먹기만 할 뿐인 상상 속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어딘가에 이것들을 싸질러내지 못하면 잠들 수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인지. 손가락에는 땀이 나기 시작했으며, 뱃속이 울렁거렸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처럼 정수리 부분이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고, 손가락과 발가락 역시 차갑게 식고 있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나서도, 나는 EMS 배송 조회 사이트에서 1일에 P에게 보낸 상자가 인천을 떠났는지, 아니면 여전히 어느 물류창고에 처박혀 있을지가 궁금했다.
너는 이런 나를 소름 끼친다고 생각할까? 아니 나는, 정말로 어떻게 느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마음을 정리한 너는 이런 내가 이해가 당연히 가지 않을 텐데. 나는 이제 너에게 이해받을 수가 없는데. 내가 아무리 외쳐도, 너에게 닿지 않을 텐데. 예전의 뜨거움이 없어지고, 차가운 원망만 남은 나의 기도는 저 동해바다를 건너는 길에 얼어붙어 저 깊은 바닷속으로 풍덩, 하고 빠져버릴 텐데.
12시가 지난 지금, P의 생일이 5일 남았다. 나는 결국 이러다,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 기절해버릴 것인지, 아니면 유통기한이 지난 항우울제를 여러 봉지 씹어 삼킬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아직 할 일들이 많이 남았는데. 이렇게 밍기적거릴 때가 아닌데. 자야 되는데, 아니, 그전에 이것만 끝내고 자야 하는데. 그런 생각만 하다가.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