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열아홉 청년, 푸른 꿈이 지다

너무나 많은 꿈의 공장들... 아직 시작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열아홉 청년, 푸른 꿈 지다

 

지난 16일 오전 9시 22분쯤 전주시 팔복동의 한 제지공장 3층 설비실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끝내 숨졌다. A군은 입사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목숨을 잃었다. 전남 순천시의 한 특성화고를 졸업한 후 현장 실습을 통해 정직원으로 입사한 그는 사고 당시 6일 동안 멈췄던 기계를 점검하기 위해 설비실에 갔던 것으로 파악됐다.

- 뉴스 보도 부분 발췌-     


전북 전주시의 한 제지공장에서 근무하다 사망한 19세 청년

유족이 공개한 메모장에 기록한 다짐이 가슴을 적신다.

 '2024년 목표'라고 적은 부분에는 '남에 대한 얘기 함부로 하지 않기' '하기 전에 겁먹지 않기' '기록하는 습관 들이기' '구체적인 미래 목표 세우기' '친구들에게 돈 아끼지 않기' 등이. '인생 계획 세우기' 항목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 '편집 기술 배우기' 등이 적혀있었다.     

경제 계획, '경제-통장 분리하기'라는 항목에 '생활비 통장' '적금 통장' '교통비 통장' '경조사 통장'으로 세세히 분류했다.   '나의 2년 시간표 정하기'라고 적은 부분에서는 '오전 근무일 경우' '오후 근무일 경우' '심야 근무일 경우' '휴일일 경우'로 나눠 일과를 효율적으로 정리했다.          


몇 년 전이었을까. 제빵기 반죽기에 앞치마가 말려들어가 사망한 그녀 생각이 났다.

그녀가 사고를 당한 곳에 하얀 천만 세워두고 아무 변화 없이 제빵반죽기는 돌아갔다. 세상에 빵을 원하는 자에게 맛있는 빵을 적시에 공급하기 위해... 누군가 죽어나가도 공장 기계는 멈추지 않았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젊음이 졌다.   제지공장의 청년도. 빵반죽기 앞의 그녀도..     

미래에 대한 다짐과 포부, 경졔 계획.... 이제 겨우 정직원 입사한 지 6개월.. 한참 푸를 나이다. 캥거루족도 아니도 부모 찬스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땀과 젊음을 믿고  겁 없이 세상에 뛰어든 청년.   

  


청년의 죽음 앞에 기형도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이 생각났다.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워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시의 첫 구절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라고 시작하지만 촉망받던 시인 기형도도 오랜 세월을 살아보지 못하였다. 

너무나 많은 생각들의 공장이 세워진 종이...

19세 청년도 오랜 세월이 흘러 메모장을 다시 읽어보았다면 너무나 많은 생각들의 공장이라고 웃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나는 19세 청년의 메모를 질투하고 있다. 그 푸른 나이. 세상을 어쩌면 그리도 잘 알고 있을까. 세상에서 살아야 할 방법을, 길을 그리도 세밀하고 철저하게 그려내고 있을까.

 나의 열아홉을 돌아보건대 감히 저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컨베이어 벨트 위의 인생처럼 막연히 , 당연히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고교를 마쳤으니 대학을 가고.. 대학을 마쳤으니 취직을 하거나 대학원에 가고.. 또 누군가를 만나 살아가고... 지극히 단순하고 막연한 인생 플랜이었다. 치열하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청년의 꿈 가득한 메모장. 이루어질 수 없는 기록들 앞에 세상의 잔인함을 생각했다.

6일 동안 멈춰있었던 기계가 19년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다. 멈춰버린 꿈이다.   

 

산책로에  누군가 민들레의 몸통을 잘라놓았다.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목 잘린 민들레가 눈에 시리도록 밟혔다.

후후 불어주어야지... 시멘트 바닥에 누워 신음하는 민들레의 꿈을 외면할 수 없었다.     


6월... 타오르는 계절이다. 여름이 오기 전(이미 와버린 )...

그 계절의 열기 속.... 마음은 여러 갈래 흩어진다.

청년의 죽음 앞에,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자 했던 청년의 죽음 앞에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목 잘린 민들레를 후후 불어 홀씨라도 날려주는 것뿐이라는... 

안타까움 가득한 계절이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작가의 이전글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