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오늘 >
< 가난한 오늘 >
이병국
검지손가락 첫마디가 잘려나갔지만 아프진 않았다 다만 그곳에서 자란 꽃나무가 무거워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사방에 흩어놓은 햇볕에 머리가 헐었다. 바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은 여전히 형태를 지니지 못했다
발등 위로 그들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망막에 맺힌 먼 길로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나는 허리를 펴지 못한다. 두 다리는 여백이 힘겹다.
연필로 그린 햇볕이 달력 같은 얼굴로 피어있다. 뒤통수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양손 가득 길을 쥔 네가 흩날린다. 뒤걸음질 치는 그림자가 꽃나무를 삼킨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꽃이 떨어진다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잘린 검지손가락 첫마디에서 본문 끝까지 온통 절망적인 시구들의 연속이다.
산업재해 노동자의 갖가지 후유증으로 인한 고통과 부양가족을 둔 가장의 고통을 형상화시켰다 보이는데 가난한 오늘의 산업재해와 그 폐해의 파장을 고도의 상징으로 함축시켰다 하겠다.
신체의 말단이 잘리고 헐고 바랜 자는 상처받은 자이고 그 상처는 가난의 흔적일 것이다. 일절 엄살이 없다. 아픔을 과시하는 헤픔을 절제하고 가난에 형상을 부여하는 힘은 정신의 야무짐에서 나온다. 시구와 시구 사이 여백이 그 시적 물증이다. 수사가 덜 화사하고 주제가 소박했지만 아픔과 미망에 대한 표현의 간절함에서 사물에 감응하는 시인의 정직과 내핍의 염결성을 느꼈고 그것에 공감했다 - 장석주 장석남의 평
검지손가락 첫마디는 잘려나갔지만 통증으로 인식하기엔 손가락 끝에서 손가락 끝을 먹고 자라고 있는 꽃나무가 무거워 허리를 펼 수 없다. 가장의 자리는 이처럼 무겁고 무섭다. 바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은 형태가 없고 발등 위로는 그들의 그림자가 지날 때 여전히 허리를 펴지 못한다. 버티고 서 있어야 하는 두 다리의 여백은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양손 가득 길을 쥔 네가 흔들릴 때 그림자가 꽃나무를 삼키고 배는 고프지 않다.
배가 고파도 고프지 않다고 느껴야 하고 손가락이 잘리는 통증도 통증이 없다고 느껴야 한다.
끝없이 살아내야만 하는 이 세상에서 사람노릇을 하려면 말이다.
병원 로비에 키가 크고 눈이 큰 인도 여인, 손가락을 감싸 쥐고 있다. 업체 관리자인 듯싶은 남자와 정형외과 진료실로 급히 들어간다. 깊은 상처인가 싶었는데 모니터에 그녀의 잘린 손가락 화면이 남아있다. 손가락이 아니라 삶의 일부가 그곳에 있었다.
멀리 떠나온 길. 누군가의 아내일지, 딸일지, 엄마일지 모르는 그녀...
당분간 일은 하지 못하리라. 봉합 수술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국에 있는 가족들과 통화를 하리라... 몸이 좀 아파서 쉬어야 한다고... 손가락이 기계에 잘렸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도 못하리라.
그녀의 눈물 고인 눈, 감싸 쥔 손....
언어가 통하지 않는 한국땅에서 그녀의 고통은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그녀에게도 사고를 당한 오늘은 가난하다
그녀를 바라보는 내게도 오늘은 가난한 오늘이다.
무려 11년 전의 시가 최근의 시처럼 여겨진다.
그것은 11년 전의 오늘도 가난했으며 올해의 오늘도 가난하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오늘’은 가난할 수밖에 없다.
이미 지나간 오늘 때문에 ‘오늘’ 가난하고
'오늘'이라는 ‘오늘’ 때문에 오늘 가난하고
아직 오지 않은 오늘을 준비하기 위해 ‘오늘’ 가난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가난’이란 단어가 경제적인 용도로만 쓰이지 않는다는 걸 체득하고 있다.
아마도 가장 크고 치명적인 ‘가난’은 경제적인 것이겠지만 끝없이 이 사회는 가난을 양산한다.
열심히 일을 해도.. 여전히 가난하다
마음도 몸도....
무언가를 하고 있지만 허기지는 것도 가난한 것이다.
10월 첫날이다
태풍이 진로를 바꿔 다가오고 있다고 한다.
하늘에 검은 구름이 가득하다. 아무 일 없기를... 가난한 모두가 무사하기를 기원한다. /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