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새들> 버나드 쿠퍼
나는 내가 들고 있지만 떨어뜨리지 않을 돌멩이처럼 굴복을 휴식의 고요를, 중력을 사랑한다. 거의 해가 질 무렵이었지만 캘리포니아의 겨울치고는 빛이 온화했고 태양이 기울어서 그림자들이 길다. 집은 매일 저녁 그러듯이 삐걱거리고 바람이 내 마당의 나무들을 뒤흔든다. ‘늙은 새들’ 나는 계속 생각한다. 그때 어떤 생각들이 떠오른다. 새장 같은 노인들의 집...
늙은 새들 / 버나드 쿠퍼
어느 오후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 장례식 예약을 해두었냐고 묻는다.
“아버지 장례식이요?” 나는 되묻는다.
....
가족이란 아버지와 나 둘뿐이다.
나는 가끔 하루가 끝나 갈 무렵이면 침대로 기어들어가 작업 계획을 꼼꼼히 생각해 보곤 하는데 끈덕진 아버지조차도 그렇게 누워 있는 것은 업무가 아니라고 나를 설득하지 못한다...
언젠가 알베르토 아인슈타인이 한쪽 팔을 매트리스 너머로 뻗고 손에 돌을 쥔 채 몇 시간이고 침대에 누워 지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러다가 잠이 들면 손바닥이 펴질 것이고 그러면 돌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아인슈타인을 깨웠다. 바로 이 상태, 반쯤 잠든 에테르 속에서 가장 섬세한 생각을 발견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여든아홉 살 아버지. 손은 떨리고 생각은 뒤죽박죽인 남자
어머니는 생전에 아버지가 밤이면 벽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고 자기 배터리를 꽂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에너지가 시들지 않는 남자였다.
“오늘 관 계약금을 치렀다. 방수에 자단목으로 만들었단다. 피아노처럼 예쁘다... 관을 두 개 사면 할인해 준대. 그래서 너한테 물어본 거야. 값이 싸질 거야.”
“고마워요. 끔찍하게 자상하시네요.”
아버지는 차들이 지나는 거리 한 복판에서 땅콩버터 병뚜껑을 열어줄 누군가를 찾고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0년이 지나자 옛집은 아버지 혼자 살기에 너무 컸다. 아버지가 그 집을 떠난 후에야 나는 아버지가 새집에서 길을 잃는 착각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거리에서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유토피아 : 모더니즘의 신화인가?’라는 강연을 마치고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 노인이 자동차들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가는 게 보였다.
노인은 운전자들에게 차창을 내려보라고 손짓하더니 피클병을 내밀었다..
아버지가 내 차에 가까이 왔을 때에야 그 노인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다.
“야, 지미... ” 섬뜩할 정도 무심하게 피클병을 내밀었다. “관절염 때문에.”
무릎 사이에 피클 병을 끼고 병뚜껑과 씨름을 하면서 진공포장된 피클병과 싸워야 하는 세상의 모든 관절염 환자들을 생각한다.
.... 열린 병을 돌려주는데 뒷 자동차들의 경적이 울린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백미러로 아버지가 눈부신 헤드라이트 불빛과 끽소리를 내며 멈춰 서는 브레이크에 용감하게 맞서는 모습이 보였다.
....
늙은 아버지는 세상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한다.
지난달에는 30km나 떨어진 곳까지 가서 전화를 걸기도 했다.
“여기가 어디요?”
“거기가 어느 거리인지 알려주세요. 제 아버지는 길을 잃어버려서 그런 거예요. 거리 표지판을 읽어주세요.”
아버지와 나는 닮아간다
점점 뒤로 물러나는 이마 선, 갈라진 턱, 기미가 생기는 위치, 아버지가 그토록 강박을 보였던 끝을 향해 돌진하는 경향...
“윌셔 중부 지역 프로젝트 작업을 했어요. 그 동네에 살았지만 거기서 물러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저소득층 주거지를 만들 거예요.”
“늙은 새들 무리로구나.”
아버지가 무뚝뚝하게 말한다.
“내 친구들 절반은 죽었다.”
균형감각과 시력, 식욕, 손가락의 감각의 상실, 통제력의 상실,,,, 묘비와 무덤들..
죽은 자는 언제나 산 자보다 수적으로 우세하다.
“좋은 생각이 났어요. 거기 공중전화기를 보고 숫자와 지역번호를 알려주세요.”
“누가 그 위를 죄다 긁어놨구나.”
“ 그 옆 칸 전화기는 어때요?”
“50센트를 넣으세요.” 자동 안내 멘트가 흐른다.
“잔돈이 없어. 집에 가서 지갑을 가져올 때까지 기다려주면 안 되겠냐?... 1분이면 될 줄 알았단 말이야. 난 지금 슬리퍼 차림이라고.”
그 애원이 아들을 향한 것인지, 육체 없는 목소리를 향한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아빠.... 옆 칸 공중 전화기 번호를 불러주세요. 제가 그 전화로 걸게요.”
나는 기다렸다. 방안을 오락가락했다. 귀에 전화기를 바짝 붙이고 러시아워의 경적을 들었다.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에도 나는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 갈 준비를 했다. 나는 내가 들고 있지만 떨어뜨리지 않을 돌멩이처럼 굴복을 휴식의 고요를, 중력을 사랑한다. 거의 해가 질 무렵이었지만 캘리포니아의 겨울치고는 빛이 온화했고 태양이 기울어서 그림자들이 길다. 집은 매일 저녁 그러듯이 삐걱거리고 바람이 내 마당의 나무들을 뒤흔든다. ‘늙은 새들’ 나는 계속 생각한다. 그때 어떤 생각들이 떠오른다. 새장 같은 노인들의 집, 이상한 생각이었지만 실현 가능했다. 이국의 새들이 모여 사는 널찍한 중정을 그려본다. 거대한 천장 아래 열대의 야자수와 바니안나무가 자란다. 거주자들은 각자 창을 통해 공중에 높이 뜬 카나리아들을, 터무니없는 논쟁을 벌이는 앵무새들을, 동족을 향해 노래하며 깃털을 다듬는 콩새들을 볼 것이다.
그때 전화가 죽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황량한 경적의 쉿 소리를 들으며 나는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외쳐 불렀다.
화자는 건축가로 로스앤젤레스 거리를 맨발로 걸으며 차에 탄 낯선 사람들에게 땅콩버터병을 열어달라고 부탁하는 여든아홉 아버지. 알츠하이머, 관절염을 잃는 아버지는 진공포장된 유리병뚜껑을 혼자서는 열지 못한다.
슬리퍼 차림으로 차들이 다니는 도로를 헤매고 다니는 아버지.
멀리선 아버지가 아니라 술 취한 노인으로 보였지만 그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보니 아버지였다.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은 아버지의 전화를 받는다. 그러나 위치를 특정할 정보가 부족하다.
공중전화기 너머로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리고... 전화가 끊긴다.
아버지는 관을 1+1로 구입하면 세일을 많이 해준다고 말했다.
죽어서 들어갈 관... 1+1은 마트에서나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죽음의 관, 유골함을 구입하 때도 1+1 세일을 고려해야 하다니...
한때는 전용 충전기라도 있는 듯 자고 나면 에너지가 펄펄 넘치던 아버지..
건축가인 아들은 노인 거주 시설을 설계하는 작업 중이다.
아버지의 말처럼 늙은 새들을 위한.. 새장 같은 디자인의 노인 거주 시설을 생각해 낸다.
공중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기고... 아들은 아버지를 소리쳐 부른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예약한 1+1관을 세일 가격으로 구입했을까.
낯선 거리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새장 같은 노인 거주 시설을 설계 중인 아들도 언젠가는 늙은 새가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손에 쥐고 잠든 돌멩이가 어느 순간 중력에 충실하듯이...
우리들의 삶이란 것도 손에 꼭 쥐고 있을 때는 ‘삶’이라 부르지만 잠들어버리면 손의 힘이 풀리고 손에 쥔 돌멩이는 추락한다.
돌잔치나 결혼식보다 장례식에 자주 가는 나이가 되었다.
어느새...
장례식에 가면 여든 이후의 죽음에 대해... 어딘지 모르게 홀가분해 보이는 표정의 사람들을 본다.
죽음에 좋은 죽음이 존재할 리 없건만 심지어 호상이라는.... 말도 공공연히 하지 않던가...
젊은 날, 부모님의 죽음 앞에서 나는 어떤 상주의 모습으로 기억되었을까?...
죽음은 아주 먼 단어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다가와 경황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누구나 늙은 새가 된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늙은 새, 늙은 벌....
버나드 쿠퍼는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분노를 품고 있는 동시에 애정을 지닌, 연민과 그리움의 언어로 이 소설을 썼으리라. 남의 이야기 같지 않은.... 지어낸 이야기 같지 않은
우리 주변의 익숙한.... 풍경 같은 이야기가 가슴을 저미는 가을 아침이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