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바람은 살아있는 화석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 뒤에도 스스로 살아남아서 떠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 속에서 운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바람의 세계 속에서 울다 간다
바람이 불자
새들이
자신의
꿈속으로 날아간다
김경주 < 바람의 연대기는 누가 다 기록하나> 부분
풍래수면시
이강소의 전시명 ‘풍래수면시’는 ‘바람이 물을 스칠 때’라는 뜻으로, 새로운 세계와 마주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의식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송나라 성리학자 소옹의 시에서 따왔다고 한다.
바람의 결에 따라 수면의 표정이 달라진다. ‘바람이 물을 스칠 때’라는 전시명은 관람객 저마다의 가슴에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작품에 대한 느낌의 파동이 다를 것임을 암시한다.
“일부러 그림을 덜 그리려고 합니다. 그러면 보는 사람이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 연상하고 상상하게 되죠. 제 작업은 순간순간 성립되는 관계와 같습니다.”
그리다 만 것 같은 그림과 아무렇게나 던져진 조각들 속에 의미를 담고 있다.
불변하는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가 없다면, 내가 바라보는 ‘대상’도 실재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 한국 실험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이강소의 작업은 바라보는 대상에 대한 의심과 회의,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담겨있다. 무심하게 휙 긋거나 칠한 듯한 그림들은 ‘그리다 만’ 것처럼 보이고 작품에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작품에서 보고자 하는 것을 선택해서 보게 될 것이다.
이강소는 “제목을 ‘섬에서’라고 붙이면 사람들은 섬을 볼 것이고 ‘강에서’라고 붙이면 강을 볼 것”이라고 말한다.
여러 겹의 윤곽선이 겹쳐져 그려진 사슴 한 마리.
정면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옆면을 바라보는 것처럼도 보인다. 흐릿한 윤곽선이 사슴이 고개를 움직이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분명 뿔 달린 수사슴을 그린 것이 분명한데도 이 작품의 제목은 ‘무제’다. 관람객이 사슴으로 본다면 사슴이지만 사슴으로 보지 않고 또 다른 무엇으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사슴이 아니므로... 작품명은 정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사슴 아닌 무엇으로 보이는가?
<소멸>은 1973년 명동화랑에서 열린 첫 번째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업으로, 오래된 선술집에서 실제 사용하던 탁자와 의자를 전시장으로 옮겨와 일주일간 선술집을 운영한 것을 작품화하였다.
선술집의 낡은 탁자와 의자에 남겨진 흔적들은 시간과 기억을 품고 있다.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에 있다 해도 경험은 개별적일 수밖에 없고, 개별적인 경험들이 전혀 다른 형태의 기억으로 퇴적되기도 한다. 그러하기에 작품명을 ‘소멸’이라 하지 않았을까?
여전히 그 선술집의 탁자와 의자지만 저마다에게 전혀 다른 탁자와 의자로 기억되고 있으니 선술집은 낡은 탁자와 의자의 본질은 ‘소멸’인 셈이다.
내가 보는 세계가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어디까지가 가상(허상)인가..
박제된 꿩과 그 뒤에 찍힌 꿩발자국, 이미 박제가 된 꿩, 걸을 수 없는 꿩 뒤에 총총히 찍힌 발자국. 박제가 된 꿩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남아있는 발자국. 쪼개진 돌과 쪼개지기 전의 온전한 돌의 이미지 사진을 나란히 배치한 작품도 있다. 쪼개진 돌이든 온전한 돌이든 같은 돌이다.
<나무의 기억-1>이란 작품은 분황사 잔해 중 종각 기둥 3개(배흘람양식)를 현대적 전시장 안으로 가져와 상인방과 배치해 둠으로써 과거로 가는 문을 연상시키는 작업이다. 오래된 사찰의 기운을 품은 기둥 주변을 거닐며 안과 밖, 오래된 나무의 기억을 읽고 상상할 수 있다.
“나의 페인팅 이미지들은 나의 의도와 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며 새로운 이미지의 산출, 그 자체에서 이미 그려지는 것이다.” -이강소(1992)
오늘 나의 모습은 어디까지가 나의 모습이고 어디서부터 나의 모습이 아닐까
나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의 속의 나는 전혀 다른 나로 분산되어 존재한다.
그들 마음속에 존재하는 파편화된 나를 끌어모아 하나의 덩어리로 합친다면 온전한 ‘나’가 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이 바로 ‘나’ 일 것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나’가 될 수 없다.
매 순간 변화하는 존재...
살아있는 모든 것들, 살아있지 않은 모든 것들 조차도 온전히 같지 않다.
풍래수면시. 우리는 모두 바람결이 수면을 스치는 순간에만 존재한다.
바람이 스치고 간 뒤의 우리는 스치기 전의 우리가 아니다.
마법의 주문 같은 말 ‘풍래수면시’를 읊조리는 11월... 바람이 차갑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