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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태.. 고대 희랍어에는 제3의 태가 있다고 하지

     

언제나 필사적으로 삶에 대해 생각하며 살아가는 일...


*중간태  : 영어나 우리말에는 없는 헬라어 특유의 용법으로 주어가 그 행동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받거나, 그 행동에  자기 자신이 깊이 관여됨(원인, 강조)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용법임     


고대 희랍어에 수동태와 능동태 말고 제3의 태가 있다는 것,  중간태라는 태는, 주어에 재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사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 중간태를 쓰면 무엇을 사서 결국 내가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다’라는 동사에 중간태를 쓰면, 무엇인가를 사랑해서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 됩니다. 영어에  ‘kill himself’라는 표현이 있지요? 희랍어에서는 himself 없이  이 중간태를 사용해서 한 단어로 말할 수 있다. 이렇게,         

       


고대 희랍인들에게 덕이란 고귀함이 아니라 어떤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고 하잖아. 삶에 대한 사유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언제 어느 곳에서든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는 사람... 덕분에 언제나 필사적으로 삶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 사유에 관한 한 최상의 아레테를 지니고 있는 거 아니겠니?   

  

P131

아르스토텔레스를 강의하던 보르샤트 선생이 잠재태에 대해 설명하며 “앞으로 내 머리는 하얗게 셀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죠. 지금 눈이 내리고 있지 않지만, 겨울이 되면 적어도 한 번 눈이 올 것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내가 감동한 것은, 오직 그 중첩된 이미지의 아름다움 때문이었어. 강의실에 앉은 젊은 우리들의 머리칼이 키 큰 보르샤트 선생의 머리칼이 갑자기 서리처럼 희어지며 눈발이 흩날리던 그 순간의 환상을 잊을 수 없어.

플라톤의 후기 저작을 읽을 때, 진흙과 머리카락, 아지랑이, 물에 비친 그림자, 순간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동작들에 이데아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내가 그토록 매혹되었던 것도 마찬가지였어, 오직 그 의문이 감각적으로 아름다웠기 때문, 아름다움을 느끼는 내 안의 전극을 건드렸기 때문이었어.     


P132

어둠의 이데아, 죽음의 이데아, 소멸의 이데아에 대해 새벽까지 이야기 나누던..     

모든 이데아는 아름다움이며 선함이며 숭고함이라고 너는 말했지... 모든 이데아는 좋음의 이데아와 관계 맺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니.. 서울과 베네치아와 프랑크푸르트와 마인츠의 광장들이 같은 하루에 모두 존재하는 것과 같이.     

고개를 흔들며 나는 너에게 물었지. 소멸의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그건 선하고 숭고한 소멸 아닐까? 그러니까 소멸하는 진눈깨비의 이데아는 깨끗하게, 아름답게, 완전하게, 어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진눈깨비 아닐까?     

너는 고개를 저었지. 죽음과 소멸은 처음부터 방향이 다른 거라고. 녹아서 진창이 되는지는 깨비는 처음부터 이데아를 가질 수 없는 거야.

네 말을 듣는 순간, 덧없는 전 세계가 빛을 잃었지 그러나 영원히 녹지 않은 채 흩날리는 진눈깨비, 영원히 바닥으로 내려앉지 않는 진눈깨비의 세계는 여전히 어두운 환영처럼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어,     

너는 다시 달래듯 말했어.

어둠에는 이데아가 없어. 그냥 어둠이야. 마이너스... 쉽게 말하면 0 이하의 세계에는 이데아가 없는 거야. 아무리 미약해도 좋으니 빛이 필요해, 미약한 빛이라도 없으면 이데아는 없는 거야.... 가장 미약한 아름다움. 가장 미약한 숭고함이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플러스의 빛이 있어야 하는 거야. 죽음과 소멸의 이데아라니! 너는 지금 동그란 삼각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야.           

-  한강 < 희랍어 시간> 발췌


빛을 잃어가는 희랍어강사에게 어둠의 이데아는 소중하다.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차디찬 회색눈을 지닌 그녀. 청력을 잃어버린 그녀에게 이데아는 미약한 빛이 있어야 이데아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여자에게 이데아란 무엇일까. 빛과 어둠이 아닌, 빛의 세계도 어둠의 세계도 아닌 것, 손끝으로 붙잡아서 노트 위에 적을 수 있는 것만이 이데아가 아닐까. 발화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밖으로 열린 입이란 구멍을 통해 흩어지면 소멸해 버리는 것이니..

잠재태와 같은 것이 아닐까. 존재하고 있다는 명백한 현실 외에 세상의 커튼 뒤에 움츠리고 숨어있는 것, 도사린 것들.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면 참고 있는 것들.     

성대를 울리고 목구멍을 통해... 입을 통해.. 문을 열고 뛰쳐나가는 목소리들이 두려워진 것이다. 아무렇게, 아무렇지 않게 배설되는 언어.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는  이미 죽은 언어를 가르친다. 이미 죽은 언어, 희랍어를 가르침으로써 시력.... 세상의 진짜를 볼 수 있는 시력을 유지하려는 노력 같은 것일까?

어둠의 이데아, 소멸의 이데아를 칭송하던 남자를 살아있고 빛의 이데아를 이야기하던 그녀는 어둠의 세계로 떠났다.

목소리가 밖으로 달아나지 않게 문을 잠그고 있던 여자는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를 위해 처음으로 입술을 오므려, 발화를 시도하는 것일까...      


이데아... 생성의 이데아가 있다면 소멸의 이데아가 있을 것이다. 빛의 이데아가 있다면 어둠의 이데아가 았을 것... 새하얀 눈이 아니더라도 진눈깨비에게도 숭고한 진눈깨비만의 이데아가 있을 것...

내게 기쁨의 이데아가 있다면 슬픔의 이데아도 있을 것 , 유희의 이데아가 있다면 좌절과 비애의 이데아도 있을 것이다...  양의 이데아가 있다면 음의 이데아도 있을 것...  

   


*중간태  : 영어나 우리말에는 없는 헬라어 특유의 용법으로 주어가 그 행동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받거나, 그 행동에  자기 자신이 깊이 관여됨(원인, 강조)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용법


 행동에 자신이 깊이 관여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용법이라..

어쩌면 우리는 중간태. 어떤 일에 자신이 깊이 관여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내게 돌아오는 결과가 나의 책임이라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 능동이든 수동이든 둘  중 하나에 서 있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사용되지 않는 제3의 태,  그 시대에는 중간태를 사용해야만 상대에게 자신의 의도가 정확히 전달되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영어에는 꽤 많은 시제가 있다. 

우리말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 3개의 시제뿐

그 시제만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내용을 화려한 수식어로  혹은 종결어미의 변형으로 무마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삶도 과거, 현재, 미래로 칼로 무 자르듯 단절시켜 생각할 수 없는 것인데...

과거의 어떤 행위가 여전히 현재의 내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현재의 어떤 행위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잠제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하다면 나는 온전히 현재에 속해있지 않다.

현재에 발을 딛고 있지만 분명 과거의 내가 내 안에 살고 있고.... 언젠가 오기를 바라는 미래의 내가 이미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으니까...

12월 첫날이다. 

마지막 한 장 남은 달력을 넘긴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올해도....

무엇을 하며 살아왔을까.... 그리고 남은 시간 한 해를 잘 마무리해야 한다.


어떤 행위(말이든 행동)든 내게 잠재적으로 영향을 주게 마련이고 

나는 수동과 능동 사이 제3의 태안에서... 스스로에게  책임을 다하고 싶다.

그리 살고 싶다. 이제 한 달이 주어졌다. 내게/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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