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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라라 Mar 03. 2021

첫번째 남자친구

내 첫번째 남자친구


세번째 데이트에서 키스를 했다. 아무 느낌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신은 외로워지기 싫어서 나를 사랑했던 것 같다. 술을 마시다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미국에 가야 한다고 했다. 짧으면 1년 길면 3년이라고 했다. 우리는 고작 세번 만났는데. 나는 기가찼다. 나는 잘 다녀오라고 난 다른남자를 만나고 있을 거라고 했다.


당신은 거의 2주동안 매일 나를 찾아왔다. 만나주지 않으면 문앞에 선물을 두고 갔다. 집에 돌아와보면 문고리에 마트에서 산 딸기나 소보루빵 같은게 걸려있고는 했다. 그때 우리는 가난한 대학생이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같이 사는 것도 아닌데 남의 집에 찾아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고. 그 선물들을 보면 이게 무슨 궁상이고 진상인가 싶었다. 전화통화를 하면 끊을 줄을 몰랐다. 드라마를 보면서 건성으로 대답을 하다가 시간을 보면 통화한지 두세시간이 되어있었다. 당신은 커플 요금제를 하자고 했다. 지금도 그런 요금제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커플사이에만 쓰는 요금제인데 우리가 왜 그걸 해야되는지 모르겠다고 정색을 했다.


함께 있어도 즐겁지도 않았고 지루했다. 자꾸 다른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다시는 연락을 하지 말라고 했더니 당신이 울었다. 나는 전혀 슬프지 않았다. 비가 오는데 그 당신을 두고 갔다. 한참뒤에 당신이 따라오더니 나를 불러세우고 우산을 사왔다며 우산을 주고 갔다. 비를 맞으면서 갔다. 계산된 행동인가 싶었지만


그 우산을 들고 집에 가면서. 내내. 당신이 생각이 났다. 잘못한게 없는거 같은데 미안했다. 비가 그치고

우산이 필요 없어진 이후에도 현관에 놓인 우산이 자꾸 눈에 보였다.


어쩐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당신 다시 만나고 있었다. 일주일을 더 만났다.


나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을 믿는 사람이었다. 외로움을 많이 타고. 지금 내 눈앞에 나타날 수 없는 남자를 사랑하느니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게 낫다. 당신도 지금은 나를 좋아하지만 다른나라에 가면 다른사람이 생길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을 기다리지 않겠다. 라고 말을 했었다.


당신은 유학을 갔다. 한달을 만났고 일년간 떠나있어야 했는데. 나는 공항까지 따라가지도 않았다. 도착해서 당신이 전화를 하는데 남은 시간이 365일이라고 생각하니 다른남자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리고 여러사람을 만났는데 재미가 없었다.

당신이 생각이 났다.


당신은 아침마다 내게 전화를 걸었다.

당신은 매일 다른 노래를 불러줬다. 취중진담을 부르고 한번만더를 부르고 세월이 가면을 불렀다. 당신은 노래를 잘 불렀다. 그래봤자 태평양 건너에 있는 사람이었다. 가끔 화가나는 일이 있으면 전화를 안받았다. 자고 일어나면 부재중 통화 수십개가 와있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당신은 매주 내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당신이 아침에 전화를 걸지 않으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외로워졌다.

나는 당신에게 편지를 썼다. 일주일에 한번씩 우체국에 갔다. 편지에는 쓸 얘기가 없었다. 우리는 고작 한달 만났을 뿐이니까. 쓸 얘기가 없는데도 몇장씩 썼다. 뭘썼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친구들은 오늘도 우체국에 가냐면서 놀렸다. 집에 돌아갈 때마다 우편함을 확인하곤 했다.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갔다.

일년이 지난 후에 나는 공항 출구 앞에 앉아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십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고 매달 엄청난 국제전화비를 지불했었다. 사귀자고 분명히 했던 사이도 아니었던거 같은데. 어째서 일이 그런식으로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두시간전에 공항에 도착해서 열번도 넘게 거울을 봤다. 당신이 문앞에서 나오는걸 보려고 했는데 왜인지 당신은 다른 출구에서 나왔고 등뒤에서 내게 말을 걸었다. 영화에서는 공항에서 재회를 하면 격정적인 포옹을 하고 눈물을 펑펑 흘리는데. 당신을 보니 웃음만 났다.

그리고 연애를 했다.

일년동안 애인이 생기면 하고 싶었던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다. 놀이공원 가기라던가. 남산타워. 야구장. 벽에 서로 하고 싶었던 것들을 적은 종이를 붙였다. 목록이 40개쯤 됐다. 하나를 하면 빨간펜으로 하나씩 지웠다. 30개쯤의 목록이 사라졌다. 마지막 문장에는 결혼하기 라고 씌여있었다.

결혼을

만일 한다면 당신과 하겠지.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몇 년이 지났다. 당신의 집안에서는 일단 결혼을 하라고. 일단 집안에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어째서 내 결혼을 당신의 아버지의 정년퇴임 전에 해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더 가까운 사람이 된줄 알았는데 더 먼 사람이 됐다. 취업준비생이던 당신은 직장인이 됐다. 당신도 다른 남자들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여자문제로 크게 싸운적이 있었다. 한번은 정말 헤어지자고 크게 싸웠고 일주일이 넘게 연락도 안했었다.

문을 두드리기에 열어줬는데 당신이 곰인형 탈을 쓰고 서 있었다. 당신은 손에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 음악을 틀더니 스케치북을 한장 한장 넘겼다. 거기에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런 내용이 써있었던거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당신이 유학갔던 시절에 쓰던 말투로. '사랑하는 '이라는 단어가 씌여있었다. 왠지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고. 스케치북 마지막 페이지에는.


나를 용서한다면 코를 만져주세요. 라고 써있었다.

곰인형탈의 코. 울다가 웃으면서 인형탈을 벗겨줬는데 그 안에는 땀이랑 눈물로 범벅이된 당신이 들어있었다.
나는 당신을 끌어안고 절대로 헤어지지 말아야지. 곰인형 탈을 쓰고 사과하는 남자와는 절대로 절대로 헤어지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쇼핑센터에서 말다툼을 하다가 당신이 나를 두고 가버렸다. 영화를 보고 벚꽃도 보려고 했었는데 당신이 가버렸다. 헤어지자는 말을 내가 했었나 그런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나는 연락하지 않았고 처음으로 당신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다.


당신이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알리면 주변반응은 대부분 그랬다. 어떻게 당신이 그런짓을 할 수 있느냐. 그런식이었다. 어릴때 만나서. 유학을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첫 차를 사고. 집을 구하고. 그 모든 시간을 함께 했었다. 당신의 모든걸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밥을 먹을때 당신이 텔레비젼을 볼때 당신이 운전을 할때 눈이 마주치면 나는 당신이 무슨말을 할지 어떤 표정을 지을 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나없이 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오만 했었다.


후회는 되지 않았다. 라고 쓰고 싶지만. 가끔 후회가 됐다. 그 시간들을. 그 감정들을. 그 노력들을 다른사람에게 쓸껄 하는 생각이 드는건 아니었다. 만나지 말걸 그랬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놀러가자고 할때 더 많이 놀러갈걸. 맛있는걸 더 많이 먹을걸. 근사한 식당에 갈걸. 돈을, 돈을 아끼지 말걸. 나중에 잘해주려고 하지말걸.


나중이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말걸.


그게 후회가 됐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난 늘 그렇게 대답했다. 좋은 사람이었다고. 내가 준 것에 비해 더 많은 사랑을 줬던 사람. 내가 사랑을 할 줄 몰랐던 때에도 나를 사랑했던 사람. 내 첫번째 남자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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