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충동 11_그림책『코를 킁킁 The Happy Day』_루스 크라우스
#1 그녀의 대답
<달팽이 회동> 카페에 들어가니 그녀의 글이 눈에 띈다. 제목은 ‘전래동화 속 코드’이다. 얼마 전부터 이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진전이 있었나 보다.
“왜 전래동화 속에는 새엄마가 단골로 등장하는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때부터 궁금해했던 해묵은 질문이다. 그녀의 글에 들어 있는 대답이 마음으로 곧장 들어온다. 새롭고 의미심장하다. 아직 쓰이지 않은 페이지를 펼쳐 들고 온종일 책장을 넘긴다. 덩달아 달음박질친다.
#2 그림책
그림책 한 권을 꺼냈다. 『코를 킁킁(원제 The Happy Day)』, 나를 그림책이라는 세계로 빨아들인 운명의 책이다. 표지에 곰이 있다는 이유(그 무렵 큰아이가 곰이 나오는 그림책을 좋아했다)만으로 집어 들었다가 홀린 듯 내달았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을 때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었다. ‘감동적’이라는 표현이 꼭 어울리는 그림책이었다.
표지의 바탕은 환한 노란색이다. 그 위로 펼쳐진 하얀 배경 위에서 동물들이 춤을 추고 있다. 화면을 꽉 채우며 앉아 있는 커다란 곰, 몸집 차이가 나는 마르모트, 다람쥐, 들쥐, 그리고 자세히 보아야 비로소 눈에 띌 정도로 작은 달팽이, 이렇게 다섯 마리가 모두 함께 흥겨워하고 있다. 수십, 수백 배의 몸집 차이가 나고 경우에 따라서는 천적 관계가 될 수도 이 동물들이 모두 함께 행복해하고 있다. 무엇이 이들을 이처럼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어떻게 이 동물들이 모두 함께 춤을 추고 있는 것일까?
하얀 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눈은 들판에, 숲에, 산에 골고루 내려앉으며 온 세상을 하얗게 감싸 안고 있다. 그루터기에는 소복하게, 나뭇가지 끝에는 섬세하게 쌓여간다. 동물들은 겨울잠을 자고 있다. 들쥐들은 바위틈에, 곰들은 동굴 속에, 작은 달팽이들은 둥근 껍질 속에, 다람쥐들은 나무 구멍 속에, 마르모트들은 움푹한 땅속에 잠들어 있다. 흑과 백, 두 가지 색으로만 표현된 그림은 고요한 겨울 속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농담으로 표현해낸 원근감과 섬세한 묘사가 마음에 스며든다. 한 장, 두 장, 세 장 책장을 넘기는 동안 겨울의 아늑함에 젖어들며 졸음이 온다.
그런데 갑자기 어찌 된 일일까? 모두 눈을 떴다. 모두 코를 킁킁. 들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을 다투어 눈밭으로 달려 나온다. 반쯤 눈을 뜬 곰들이 굴 밖으로 서서히 고개를 내민다. 달팽이들은 더듬이를 한껏 늘이며 움직이기 시작하고, 다람쥐들과 마르모트들도 몸을 쭉 내민다. 이윽고 모두 코를 킁킁거리며 하얀 눈 위를 달리기 시작한다. 들쥐, 곰, 달팽이, 다람쥐, 마르모트들이 줄지어 달린다. 눈은 펄펄 내리고, 동물들의 몸은 하얗게 변해간다. 줄지어 달려가던 동물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섞여 든다. 뒤에서 달려가는 들쥐도 보이고 앞서서 기어가는 달팽이도 보인다. 모두 킁킁거리며 한 방향으로 달린다. 하얀 동물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드디어 모두 멈췄다. 모두 함께 웃으며 신나게 춤을 춘다. 동그랗게 모여 선 동물들의 시선이 한 곳을 향해 있다. 저마다 다른 몸짓으로 기쁨과 웃음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다음 장을 넘긴다.
모두 동시에 '와!' 하고 외쳤다. 그들이 눈을 반짝 뜨고 보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이 그림책에서 유일하게 색채로 표현된 ‘그것’이, 그곳에 있다. ‘그것’은 흑백 그림책 속에서 극적으로 등장하며 존재감을 획득한다. 색채가 전달하는 의미를 독자는 바로 이해한다.
#3 superfluity, 꼭 필요한 것 이상의 것
루스 크라우스가 글을 쓰고 마르크 시몽이 그림을 그린『코를 킁킁』은 간결한 문장과 의성어가 돋보이는 그림책이다. 노래하듯 반복되는 문장이 점층법을 구사하는 동안, 화면은 섬세한 묘사와 과감한 생략을 통해 겨울 풍경을 고스란히 옮겨 놓는다. 흑백 그림책이지만 적절한 농담을 통해 원근과 시간의 흐름을 표현함으로써 책 전체에 율동감을 부여한다.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의 절묘한 어우러짐에서 나온 생기가 점점 하얗게 변하다가 한순간 색채로 마무리된다. 독자는 단숨에 사로잡힌다.
우리 삶에는 꼭 필요한 것 이상의 것(superfluity)이 있다는 것, 때로는 그것에 대한 열망이 생존 욕구보다 더 강렬할 수 있다는 것을 어쩜 이리 쉽고 간결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이 그림책을 떠올릴 때마다 했던 생각이다. 오늘 아침 그녀의 짧은 한 문단이 내게, 이 그림책처럼 다가왔다. 그 한 문단이 그녀를 뚫고 나오기까지 달려온 눈길이 영상처럼 펼쳐지면서 어느새 나도 그 눈길을 달렸다.
삶을 뚫고 나온 질문을 나누고, 생각을 보태고, 말을 다듬는 일보다 더 신나는 일을 나는 알지 못한다.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서 ‘꼭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이라 불리지만 사실은 우리 삶에 그 무엇보다 꼭 필요한 것, 우리는 누구나 그것을 향해 달린다. 코를 킁킁거리며.
* 아직 이 그림책을 만나지 않은 분을 위하여 ‘그것’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고 남겨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