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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경 Oct 02. 2020

떠나는 사람들

62년생 박미경 이야기

1990년대 초반, 80년대의 거센 민주화 운동의 열기는 식어가고 운동은 어느덧 흐지부지 끝나가고 있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92년 문민정부의 탄생으로 겉으로는 어느 정도 운동의 목표는 달성된 듯 보였다.


또한 1989년부터 시작된 동구권 국가에서의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베를린 장벽의 붕괴 등 우리가 믿고 있었던 신화들이 하나씩 깨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막스레닌주의와 유물론이 현실 사회에서 폐기당하는 현장을 보게 된 우리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속한 연구회에서는 글로벌한 진보 학자들의 이론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들은 유학을 떠났다. 우리가 비판하던 바로 그 제국주의로 제국주의의 이론을 배우러 말이다. 좀 더 심도 깊은 공부를 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을 배우기 위해, 미래를 위해.... 한국에서는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기에 이들은 미국과 유럽으로 떠났다.


나는 유학을 갈 돈도 없었지만, 영어공부를 하기도 싫었다. 유학을 간다는 상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왜일까? 우리 언니는 이미 영국으로 유학을 가있었다. 엄마가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서 유학비를 보내고 있었고, 언니도 영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유학을 떠날 욕심도 야망도 없었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사실 나는 미래에 대한 어떤 계획도 없었다.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무얼 하며 살 것인지, 그런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되는 대로, 그렇다고 자포자기하거나 절망스러운 것도 아닌 상태로, 그저 나는 미래를 생각하면서 살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왜 어렵게 영어를 배우고 어렵게 외국에서 공부를 하려고 하는지를 몰랐던 내가 바보였을 것이다. 무얼 하러 그들이 떠나는지, 왜 제1세계로 떠나는지 나는 몰랐다. 그렇게 나는 미래를 대비할 줄도 몰랐고, 공부를 더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몹시 피곤했다. 80년대를 살아오면서 그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와 싸워야 하고 끊임없이 검열해야 하고 내 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한 이론과 글을 양산해야 했던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은 사실 내가 감당하기엔 벅찬 시간들이었다. 무엇엔가 내몰려서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 서있는 느낌이었다.   

92년에는 유독 결혼이 많았는데 그 해 나도 결혼을 했다. 주변 대부분이 결혼을 할 만한 나이이기도 했고, 목표를 잃은 암울한 분위기에서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고, 가족들의 성화에 미뤄뒀던 결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20대 전반에 걸쳐 수많은 연애를 했던 나는 꼭 이 사람과 결혼을 해야겠다라기 보다는 결혼 이외에는 인생의 특별한 이슈가 없었다. 이젠 결혼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결혼이 큰 결심도 아니고 큰 선택도 아니었다. 주변의 대부분이 그랬다. 


반려자도 멀리서 찾지는 않았다. 정치적 입장이 다른 반려자를 만난다는 것은 당시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운동의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적 성향이 사람에 대한 검증과 판단의 기준이 되어버려서, 같은 판이라면 어느 정도는 보장된 것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끼리끼리 결혼을 했다. 


나도 민중미술 운동을 하다가 만난 작가와 결혼을 했다. 생각이 비슷하려니, 이해의 폭이 넓으려니 하고 결혼했다. 하지만 어느 경우건 실제 결혼생활은 예상하고는 많이 달랐다. 뭐 살아보지 않았으니 미리 알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적이 명백한 상황에서 같은 편을 가리는 것은 쉽다. 그러나 명백했던 적이 없어지고 나면 같은 편에 섰던 사람들이 얼마나 다른 사람이었는지 알게 된다. 미처 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것을 알게 되면 당황하게 되고 많은 상처를 받는다. 상처를 주고받는다는 표현이 맞겠다. 이럴 줄 알았는데 저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상황이 계속 벌어지는 것이다.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알 수 있는 여건이 안되었던 것이다. 어느 시대나 그렇겠지만 그 시대엔 더더욱.


그렇게 90년대 초반은 '적'이 사라진 상태에서 '우리'가 더 이상 '우리'가 아니며 서있는 곳도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 그리하여 각자가 제 갈길을 찾아 떠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베이비붐 세대였던 나는 1992년 에코붐 세대인 아이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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