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링귄 Apr 15. 2021

아저씨, 그거 제 돈입니다만? (3)

진짜 갔다, 법정.

((지난 이야기))

전세 보증금은 떼였고 집주인은 당당하고... 결국 법에 도움의 손길을 뻗은 세입자 김씨. 소송을 시작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임차권등기명령신청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집에 캐리어 하나 끌고 들어가서 버틴 기간이 무려 한 달. 더 단단해지기로 맘을 먹은 김씨는 '누가 법대로 하라고 했냐' '집 다 수리하고 나가라' 등 별의별 소리를 다 하는 집주인을 무시하고 꿋꿋하게 소송을 시작하는데..


https://brunch.co.kr/@sosohappy-you/25


2019년 봄. 당시 근무하던 회사 이사님과 외근을 가던 길이었다.


이사님 : 김 대리. 통화 자동녹음 기능 켜 놓나?

나 : (이런 걸 왜 물으신담) 아뇨.

이사님 : 난 항상 그 기능을 켜 놓거든. 우리 업무가 워낙 바쁘잖아.

나 : (얼른 외근 끝났으면.)

이사님 : 클라이언트가 유선상으로 다다다 얘기할 때가 있는데 그 순간에 그냥 네- 대답하고 잊어버리면 또 묻기 어렵거든. 그리고 업무하다가도 녹음된 내용 들으면서 클라이언트가 어떤 의도로 지시를 했는지 확인하면 더 정확하게 일할 수 있어.


평소에도 나에게 업무 노하우를 잘 알려주시던 이사님이셨고 귀찮지만 도움 되라고 하시는 말인걸 알아서 자동녹음 기능을 켜 놓았다. 그렇게 몇 개월 뒤 이사님은 나의 좋은 직장 선배에서 '인생 첫 은인'으로 승격되셨다. 


"임대기간 연장하는 줄 알았는데?"


소송 절차가 시작된 동시에 펼친 집주인의 주장이었다. 6월이 계약 만기인데 9월에 나갔다는 사실을 두고 내가 방을 빼겠다는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고 당연히 자동 연장이 됐다고 생각해 당장 보증금을 주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증거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계약 만기 3개월 전에 이미 집주인에게 문자와 전화로 말씀드렸던 내용이 고스란히 폰에 담겨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주장으로 승소한 경험이 있으시단다. 그래서 법대로 하라고 하신걸까?)


"아가씨가 망가트리고 간 것들 다 수리해 놓고 가."


임대기간 연장 카드가 먹히지 않자, 집주인은 집 수리를 요구했다. 내가 엉망으로 집을 사용해서 수리를 요구했고, 이에 응하지 않자 명도를 거부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수리를 요구하는 부분은 촬영까지 하셔서 법원에 제출했다. 배상금으로 200여만 원을 요구하셨다. 주장하는 것 중 대부분이 거짓이었다. 


그 집은 유달리 문제가 많았다. 전 세입자가 사는 방을 구경할때 있던 커텐이 내가 입주하는 날 사라져 있었고, 화장실 문은 완전 부서진 상태였다. 그외 여름 장마 때면 벽지에 빗물이 스며들었고 겨울 한파에는 난방 시스템이 엉망이었다. 물론 얘기는 했었다. 수리해달라고. 하지만 차일피일 미루시는 바람에 '그래, 2년 만 살다가 나갈건데.'라는 마음으로 독촉하지 않았다. 그게 화근이 된 것이다. 심지어는 법원에 제출한 사진 중에 마루바닥이 뜯겨진 것도 있었다. 분명히 내가 나갈 때까지만 해도 맨발로 다녀도 무방할 정도로 하자가 없었다. 집주인이 주장한 것 중에 진짜는 계량 스푼 보는 법을 프린트한 종이를 주방 서랍에 스티커로 붙인 것 정도였다. 일단 어른이니 나쁜 소리를 하는 게 어려웠고 집에 문제가 있어도 참고 살았다. 그게 오히려 잘못된 건가?


"원만하게 원금으로 끝냅시다."


재판을 시작하고 반년 넘게 시간이 흘렀을 무렵, 변호사 통해 전해 들었다. 완만한 합의를 하라는 판사의 권고가 내려졌다고 했다. 내용은 지정한 날짜까지 집주인이 원금만 나에게 주고 마무리 하는 것. 변호사는 말렸다. 끝까지 재판하면 승소하는 건인데 왜 원금만 받냐며, 변호사 선임비랑 이자도 꼭 받으라고 했다. 어차피 재판을 더 한다고 해서 변호사한테 돈을 더 줄 것도 아닌데... 진심으로 조언해줬지만 '소송'이란 걸 전혀 모르는 일반인에게는 그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특히 부모님이 스트레스를 받아 하셨고 원금 받고 마무리하길 원하셨다. 대신 합의한 이후에는 일체 하자 문제 등을 이유로 연락하지 않는 조건을 내걸었다. 무지한 내가 봐도 집주인에게 유리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집주인은 늘 예상을 빗나가는 타입의 사람이다.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나를 둘러싸고 민사재판이 일어나고 있는 사실에서 한발 떨어져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다. 새로운 회사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을 만나고 변호사와도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었다.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단 한번도 재판을 가지 않고 변호사에게 완전히 일임한 것. 사실 처음에는 집주인 할아버지가 무서워서 못 갔는데 나중에는 아등바등 모든 재판을 가는 게 얼마나 소모적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집주인은 재판에 매번 참석했다고 한다. 연세도 많으신 분이... 아마 힘드셨을거다.


마지막 재판날 법원에 갔다.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고 마지막일거라고 생각했던 재판이 몇 차례나 있었다. 아무리 관심을 끄고 산다고 하지만 지쳤다. 어떤 식으로 재판을 하는지,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변호사도 이번이 마지막 재판일 가능성이 높으니 구경 오라고 했다. 회사 반차까지 내고 법원으로 갔다. 소송, 재판, 변호사, 판사... 일생에 한번이라도 겪을까 말까 만날까 말까 싶은 단어들인데 정말 수많은 재판이 쌓여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비슷한 표정을 하고 각자의 사연으로 법원에 모여 있었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재판 직전에 집주인이 들어왔다. 1년여 만에 보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혹시나 붙잡고 나쁜 소릴 하지 않으실까. 걱정이 앞섰다. 변호사 뒤로 숨었다. 집주인 할아버지의 눈이 나를 향했다. 별다른 제스처는 없으셨다. 그렇게 우린 재판정으로 들어갔다. 


재판은 드라마와 완전 달랐다. 크게 오가는 대화는 없었고 아주 짧았다. 그나마도 집주인 할아버지 측 변호사의 변론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가만히 재판을 지켜보던 변호사는 판사의 질문에 몇 가지만 대답을 했다. 판사가 선고일을 알려주곤 재판이 끝났다. 정확히는 1심이 마무리됐다. 집주인도 아무말이 없었다. 그렇게 건물이 많으시고, 연세가 많으시고, 경험이 많으신 집주인도 결국 법 앞에선 똑같았다. 


1심 선고일,


미팅을 하던 중에 띠링- 카톡이 하나 날아왔다. 변호사였다. 결과는! 우리의 주장이 모두 받아들여졌다. 당연한 결과가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 당연한 결과를 받기 위해 1년 반 동안 참 많이 힘들었다. 물론 많은 걸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고. 승소는 했지만 아직 남은 것들이 많다. 돈을 받아야 끝나는 일이니까. 


이 힘겨운 싸움... 대체 누굴 위한 재판이고 누굴 위한 승소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비 오는 날, 서강대교 위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