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친구와 함께 극장에서 처음 <라라랜드>를 보았다. 참 멋진 영화라는 생각을 하며 만족스럽게 극장을 나왔던 기억이 난다. 2017년 겨울에 영화는 재개봉을 하였는데, 그때 관람 동반자는 내 첫사랑인 당시의 여자친구였다. 그녀의 집 근처 극장에서 심야영화로 보았고 둘 다 영화에 흠뻑 빠져서는 조잘대며 상영관을 나왔다. 영화관에서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에는 꽤 큰 공원이 있었는데, 자정이 다 되어가는 때인지라 아무도 없었고 공원은 조용했다. 그 친구와 폴짝폴짝 공원을 뛰어다니며 영화를 흉내 내는 장난을 쳤다.
이후로도 몇 번 영화를 집에서 보았다. 혼자 본 적도 있고, 엄마와 함께 소파에서 미숫가루를 마시면서 본 적도 있다. 영화가 개봉한 건 5년 전이고, 이 글을 쓰는 나는 여전히 너무 어리다. 이렇게 젊을 때에는 삶이 하루 단위로 바뀌는 것을 손 끝으로 느끼며 살아간다. 어제까지 믿던 것을 오늘은 믿지 못하고, 방금까지 사랑하던 것에게 내일 배신을 당하기도 한다. <라라랜드>에 대한 내 마음도 그렇게 변해왔다.
"LA LA LAND"는 꿈의 세계, 비현실의 세계라는 의미도 갖는다. 그들이 비현실의 세계에 있다는 가장 정확한 묘사는 '그리피스 천문대' 장면이다. 천문대에서 데이트를 즐기던 미아와 세바스찬은 이내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그 둘은 날아올라 별이 박힌 까만 하늘을 배경으로 춤을 춘다. 영화는 비현실적인 연출을 통해 그들이 꿈의 세계에서 만났다는 것을 대놓고 말해준다. 미아와 세바스찬은 그 꿈속에서 세 가지를 믿는다. 그들이 각자의 꿈을 이룰 것이라는 것, 그들이 영원히 사랑할 것이라는 것, 그들이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낼 수 있다는 것.
그건 말 그대로 라라랜드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미아와 세바스찬의 꿈은 이루기가 쉽지 않다. 세바스찬은 대중에게 외면받는 재즈로 성공하고 싶어 하고, 미아는 배우 오디션장에 있는 수많은 여자들 중 하나일 뿐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힘이 돼주고자 노력하는데, 어쩐지 마음처럼 안 되는 것 같다. 서로는 무언가를 오해하고, 상처를 준다. 꿈을 타협하기도 하고, 다시 힘을 내기도 한다. '라라랜드'에서 가졌던 비현실적인 소망을 내려놓으며 마주하는 현실에서, 사랑을 지키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이 다시 세바스찬의 재즈바에서 만났을 때, 둘은 모두 꿈을 이루었다. 서로가 곁에 없었지만 말이다. 필요가 없어서 서로를 놓아준 건지 걸림돌이 되어서 서로를 놓아준 건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꿈과 사랑 중 적어도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그건 정말 꿈같은 일이니까.
한 사람이 젊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나는 '영원에 대한 믿음'이 누군가가 젊다는 증거라고 생각해왔다. 어린아이에게는 완전함과 영원함만이 존재한다. 어린아이는 탄생도 모르며 존재하고, 죽음도 모르며 살아간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것, 한 번에 한 가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결국에는 끝으로 끝을 맺는다는 것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순진한 믿음을 부정당하며 그들은 어른으로 자란다. 어릴 때에 친족을 잃고 장례식장에서 밤을 보내 본 사람들은 이 경우를 잘 안다. 아이는 죽음을 거기에서 배운다. 상복을 입은 무거운 어깨들이 우뚝 버티고 서있는 풍경을 보며 배우는 것이다. 영원하거나 완전한 것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라라랜드에서 삶을 시작했다. 모든 것이 완전하고 영원한 세계. 나의 열망과 나의 현실이 일치하는 세계에서 삶은 시작한다. 나 역시 거기서 시작해서 나의 라라랜드를 떠나오고 있다. 그 탓에 영화에 대한 내 마음이 변해왔나 보다. 좋든 싫든 나는 나의 라라랜드를 떠나오고 있다. 언제나 그리운 그 예쁘고 귀여운 세계를 떠나오고 있다.
성장은 유한함을 마음에 익히는 일이다. 그건 순수함의 퇴색이 아니라 세계관의 성숙이다. 그리고 누구나 영원함이라는 라라랜드에서 멀어지며 익어간다. 미아와 세바스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두 사람도 두 사람의 라라랜드를 떠나온 것이다. 그런 순진함이라니, 그런 믿음이라니. 마지막에 그 둘은 잠깐 둘의 라라랜드를 상상한다.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지고, 아무 역경도 없이 꿈을 이루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웃을 일만 존재하며 불행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가짜 세계를 떠올린다. 그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영혼을 멀리 라라랜드에 잠시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온다. 미아는 꿈을 이뤘지만 옆에는 세바스찬이 아닌 다른 남자가 남편으로 앉아있다. 슬퍼할 이유는 없다.
정말로,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삶을 아름답게 만든다. 실재하는 유한함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삶을 남김없이 긍정하는 사람이다. 라라랜드에 산다는 것은 삶의 일부를 외면하고 부정하며 산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삶과 생명에 대한 혐오이다. 미아와 세바스찬은 꿈은 이뤘지만 사랑은 이루지 못했다.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세계에서는 가치 있는 것이 없다. 너무나 지키고 싶었던 소중한 사랑을 포기해야 했기에 그들의 꿈은 귀했던 것이며, 그 꿈과 대결할 만큼 사랑은 예뻤던 것이다.
<라라랜드>는 인간과 그 삶의 유한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인간은 라라랜드를 떠나 삶의 전부를 온전하게 끌어안아야 한다. <라라랜드>는 비극이지만 아름다운 비극이며,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기쁨의 영화이다.
"비극적 예술가는 염세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의심스럽고 끔찍한 모든 것을 긍정한다. 그는 디오니소스적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