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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해 별글이 Nov 25. 2023

엄마와의 추억여행 2

다시 짐을 싸야합니다.

그날 밤, 겸과 나는 머리가 닿자마자 잠이 들었고 맞춰 둔 알람에 겨우 일어났다. 조식 식사 시간 마감이 10시라 9시 30분까지는 입장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9시 20분. 부랴부랴 겸을 깨웠다. 전날 하루종일 맛없는 떡볶이를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조식 뷔페 덕분이었으니까. 부스스한 몰골로 3층에 내려갔다.

극명한 우리의 취향. 나이차 때문이라고 하자.

각자 취향 껏 차린 아침 밥상 앞에서 우리는 맛있다며 서로에게 권했다. 평소에는 ‘너나 드세요 ‘라며 입에도 대지 않았을 취향을 한 입씩 입에 넣고 맛있다며 칭찬했다. 문득 왜 이렇게 살지 못했을까 싶은 생각이 순간을 스친다.


전날 겸에게 다음 일정으로 가고 싶은 곳을 물으니 중앙박물관에 가자고 했다. 강이 뒤로 넘어져 뒤통수에 찰과상을 입었던 그곳. 다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도 느낄 겨를 없이 응급실로 뛰었던 그날 우리 가족의 모습이 떠올랐다. 서울에 오니 겸은 그곳이 생각났나 보다.

1박 2일의 짐

서울길은 까막눈이라 포털에서 용산 중앙박물관 가는 길을 찾아봤다. 같은 서울 땅인데 한 번에 갈 수 있는 방법이 나오지 않는다. 각자 하루치 삶에 필요한 짐을 백팩에 메고 다녀야 했으므로 잦은 환승은 어려웠다. 택시를 탈 수도 있었지만 이번 여행의 모토는 돈의 가치를 배우고자 함이니 제외해야 했다.


한 번의 환승으로 닿을 수 있는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마침 함께 좋아하는 그림책 작가 로렌 차일드의 전시가 있었다. 점심을 먹고 관람하고 여유롭게 터미널로 향할 예정이었다. 30분 일찍 체크 아웃을 하고 나온 길, 서울 공기가 유난히 투명하고 맑았다.


전날 무리했던 일정과 시린 공기, 오르내린 버스, 어깨에 실은 짐의 무게. 우리는 지칠 대로 지쳤고 배가 고팠다. 급기야 짜증을 내기 시작하는 겸을 위해 밥 먹을 곳을 찾아야 했다. 열한 살 아들과 대치하며 꼴사나운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마침 기념품 샵 깊숙한 곳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눈에 들어왔다.

앤서니 브라운 그림들

피스타치오 컬러 벽면에 형광 핑크의 감각적인 네온 간판이 간결하게 걸려있는 실내에 들어섰다. 벽면에 걸려있는 앤서니 브라운의 일러스트가 피스타치오 색과 묘하게 어울렸다. 밥을 먹고 싶다며 툴툴대던 겸은고민없이 불고기 리소토를 택했다. 나는 페투치네 파스타를 주문하고 진동벨을 받아 들었다.


음식이 나오는 잠깐 동안 우리는 기념품샵으로 갔다. 레스토랑과 한 공간에 있는 기념품샵이라니, 영업전략이 근사하다.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배고픔에 지루한 사람들은 기념품샵에서 필요 이상의 물건을 구매하게 될 테니까. 뻔히 아는 전략임에도 이것도 저것도 사고 싶다는 유혹에 휘말린다. 진동벨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십만 원은 족히 쓰고 나왔겠지.

신데렐라의 부엌에 놓여있는 전화기

든든히 배를 채워 기운을 차리고 전시장으로 향했다. 사랑스럽고 익살스러운 캐릭터들이 가득한 로렌 차일드의 원화들이 반갑다. 로렌 차일드는 포스트 모더니즘 그림책의 정수를 보여주는 영국의 그림책 작가다. 특히 타이포 그래피와 패러디, 메타픽션의 요소를 잘 갖춘 덕분에 페이지마다 스토리와 별개로 재미있는 요소들을 많이 담고 있다. (예를 들면 신데렐라가 전화 통화를 한다는 식)

곰 세마리 집에 들어갈 수 없는 골디락스

그녀의 그림책으로 같이 많이 웃었던 기억 덕분에 그의 그림들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겸도 꼼꼼히 살펴보며 낯익은 캐릭터들에게 애정을 쏟았다.


전시장의 끝에 닿으니 이대로 집에 가기 아쉬웠다. 겸에게 8.0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하나 물리고 다른 전시가 있나 찾아보기 시작했다. 주세뻬 비탈레라는 이탈리아 화가의 전시회가 눈에 띄었다. 어떤 사람인지 하나 아는 것 없었지만 마음이 끌렸다.


표를 끊고 이동하니 전시장 밖에 바리케이드가 쳐졌고 사람들이 빈 테이블 앞으로 길게 줄을 서있었다. 의문을 잔뜩 품은 채 근처를 서성이며 차려진 굿즈들을 구경했다. 이탈리아 화가의 사인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주세뻬 비탈레의 작품들

서성이던 사이 대기 줄이 길어졌다. 서둘러 화집을 사들고 대열에 들어가보았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을 것 같았다. 사인을 포기하고 겸과 작품 관람을 하러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림을 보고 난 뒤 결론을 내렸다. 오늘 싸인을 받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가 날 놀릴 것이 하는 결론. 서둘러 전시장을 나가 보니 벌써 대기자 마감이란다. 관계자는 다음 주에도 사인회가 있을 거라고 친절히 안내한다.

“제가 대전에서 와가지고요.”

“아, 그 화집 사인받으려고 사신 거예요?”

“네..”


줄의 끝에 서있던 관계자는 살며시 바리케이드의 벨트를 들어 올리며 자기 앞자리를 내어주었다. 시계를 보니 15시 30분. 예매해 둔 버스는 16시 42분 출발 예정이었다. 예당에서 터미널까지는 택시로 10분 거리. 16시까지만 사인을 받으면 승산이 있었다. 나는 초조함을 꾹 누른 채 앞의 사람들이 빠져나가길 바랐다. 내 속을 알 턱 없는 그 화가는 한 사람 한 사람당 정성을 다 하고 있었지만.

현실감 없는 작가님의 얼굴.

내 차례가 된 건 16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나는 어설픈 영어지만 자신 있게 그림을 봐서 너무 좋았다, 네 그림이 내게 참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더라며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겸이 화집에 부리가 긴 새를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횡설수설한 내 말에 고개를 갸우뚱 하던 그는 겸의 명확한 문장에 화사한 얼굴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정한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길, 겸은 그가 사인펜이 번질 수 있으니 마를 때까지 덮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며 펼쳐진 화보를 귀하게 모셨다.


나가자 바로 앞에서 택시를 탈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하지만 아스팔트가 보이지 않을 만큼 깔려 있는 자동차 행렬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막고 있었다. 설상가상 기사님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며 자꾸 후배와 통화를 하셨다. 애가 타는데 겸이 기사님에게 말했다.

“기사님, 그런 일은 누구나 겪을 수 있어요. 나도 내가 괜히 잘못한 것 같아서 마음 쓸 때 많은데 친구들이 아니라고 하면 믿어요. 기사님도 친구 말을 믿으세요.”


 겸의 말에 통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기사님은 그제야 액셀을 밟기 시작했다. 그리고 버스 출발 10분 전에 터미널에 내려 주었다. 하지만 내린 곳은 대전 정부청사행 버스를 타는 곳과 정반대 방향. 우리는 무거운 짐도 잊은 채 남은 힘을 그러모아 달렸다.

아슬했던 마음을 달래며 집으로 향하다.

출발 3분 전에 가까스로 버스에 올라탔을 때 나는 알았다. 이 아이와 다시 떠나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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