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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O May 12. 2023

아우라

발터 베냐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평생 지하실에 갇힌 채 자라난 아이가 그곳에서 나와 보티첼리의 봄의 정교한 위작을 보았다고 하자. 나는 그 아이가 복제품의 아우라에 압도되리라 확신한다. 예술품만 아니라 무엇이라도, ‘평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조건이 성립된다면 그것은 아우라를 일으킨다. 따라서 아우라란 대상에 내재된 객관적 특징이 아니라, 감상자가 처한 조건에 따라 그의 의식에 나타나는 주관적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드문 일이었지만 아우라를 느낀 적이 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아주 약간의 자극만 있으면 저편으로 잘 넘어가는 아이였다. 나뭇가지와 이파리가 하늘을 가리고 그 사이로 햇빛이 비추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공간감이 왜곡되고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러한 자연과의 교감에서 얻은 아우라 경험은 나이가 들며 자연스레 사라져 버렸고, 나는 성인이 되어서 처음 자의로 간 음악회에서 윤이상의 교향곡을 듣고 다시 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마약 중독자의 마음으로 예술의 전당을 전전했지만 그 기막힌 느낌을 다시 받을 수는 없었다.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돈을 내고 음악회에 갈 수 있으니, 더 이상 음악회가 나에게 일회적 감각을 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몇 개월 전 연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았다. 차 안에서 창밖을 올려다보았는데, 마치 어린 시절처럼 길가의 가로수가 나에게 손짓하는 것 같았다. 나는 실연의 충격도 잊고 그 순간에만 발생하는 기적에 빠져들었다. 연애란 너무 쉽게 생활이 되어 버리고, 상대와 함께하는 시간과 공간은 곧 특별하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더 이상 상대방과 함께 하지 못한다고 자각하고 나니 그 마지막 순간이 너무 특별해진 것이다.

 

오늘날에 아우라의 세력이 약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복제품의 범람은 분명히 원작의 가치와 아우라라는 예술적 경험의 강도를 약화시킨다. 아무리 사람들이 순례자처럼 지구 반바퀴를 돌아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앞에 가고,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본다고 해도, 이미 복제품에 노출된 적이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아우라의 강도는 두 작품의 복제품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평생 단 한 번도 예술 작품을 접한 적 없는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이 그 두 작품을 보고 느낀 아우라의 강도보다 훨씬 약할 것이다.

 또 명품 회사들은 일부러 가격을 높이거나, 한정판을 만들거나, 상품의 제작 공정에 일부러 수공업 과정을 끼워 넣어서 자신의 제품에 인위적으로 범접할 수 없는 가짜 아우라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대중의 구매력이 증가하며, 결국 해당 회사의 제품을 지닌 사람이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아우라의 몰락이 일어나고 만다. 요 10~20년간 제품 가격을 무지막지 올리며 생산 수량을 엄격하게 제한하던 샤넬이 결국 상품 공장을 중국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샤넬백의 물량이 풀리면서 줄을 서야 간신히 사던 샤넬백은 이제 누구나 언제든 쉽게 살 수 있고 결혼식에 가면 꽤나 흔히 볼 수 있는 사치재가 되었다. 샤넬에서 인위적 아우라를 부려하려는 시도를 포기한 지금, 천만 원을 주고 샤넬백을 사도 그 가방은 10년 전만큼의 아우라를 풍기지 않을 것이다. 대중의 구매력이 상승하는 지금의 흐름 속에서, 최근까지도 비싼 가격, 수공업, 고객의 선택 불가능함이라는 전략을 고수하는 에르메스는 과연 최후까지 아우라를 지켜낼 수 있을까?

 문득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 주변이 대량 생산된 아름답고 예쁜 복제품들로 포화되었다는 걸 느낀다. 자주 가는 카페 인테리어, 골목 벽에 붙은 포스터, 심지어 아주 작은 소모품조차 그 형태와 색채가 매우 아름답다. 이렇게 일상에서 아름다운 것에 많이 노출될수록, 아름다운 것에서 느끼는 감동의 정도는 약해진다. 일평생 단 한번 아름다운 걸작을 마주하는 사람이 느끼는 감동의 총량과, 평생 아름다운 복제품들 사이에 파묻혀 지내는 사람이 느끼는 감동의 총량은 같거나 혹은 전자가 더 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름다운 복제품이 범람하는 지금이 더 좋다. 나는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는, 돈으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예쁜 복제품들로 내 주변을 채워 넣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이 복제품들은 전혀 압도감이나 경외감이 들지도 않고 숭배할 만하지도 않지만 내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며 감각적 만족을 준다.

 과거에 천재가 손수 만든 작품만이 아우라를 지닌다고 생각되었을 때는, 예술 작품은 정말로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건지 희소성과 권위 때문에 가치 있는 건지 판단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작품을 마주하면 나는 모두가 인정하는 걸작에 그저 수동적으로 감탄해야 했을 것이다. 만일 그러지 않는다면 예술적 감식안이 없는 무지렁이 취급을 받기 십상이니까. 그런 점에선 오히려 현대의 아름다운 복제품들이 내가 더 솔직하게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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