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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초록 Mar 18. 2024

다정하고 안심되는 빛줄기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리뷰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저자 최은영

출판사 문학동네

출간일 2023.08.07

페이지 352


최은영 소설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두 사람' 구도는 어딘가 아련하다. 마음의 통각 지점이 비슷한 이들이 만나 서로 아픔을 헤아리는, 하지만 그런 시절은 길게 가지 않는다. 그래서 아련한지도 모르겠다. 표제작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나 <일 년>이 그랬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처음 접했는데 그때는 희원에게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일 년>의 그녀와 다희처럼 서로에게 잠시동안이라도 마음속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일 년>의 그녀가 다희와 이야기를 하면서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듣기 싫었던 마음 안에도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부분에 엄청 공감했다.


소설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은 <답신>과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이다. <답신>을 읽으면서 느꼈던 분노는 살아가면서 목격해 온 무수하지만 흔한 부조리의 기억들이 일으키는 거부 반응이었다. 아버지의 방임과 언어폭력 속에서 자란 자매는 누군가의 호감을 살 수 없을 거라는 불안을 안게 된다. 그루밍 성 착취에 취약한 존재라는 것을 그들 자신은 깨닫지 못한다. "나한테 이렇게 잘해준 사람은 없었어."라는 언니의 말에는 그 불안이 투영되어 있다. 자매가 애틋한 사이이긴 했지만 언니는 동생을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이기보다는 지켜줘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언니가 결혼하면서 힘들게 모은 목돈을 동생에게 주면서 갚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물론 언니가 동생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동생을 떠나는 죄책감을 털기 위한 행위였던 걸로 보였다. 즉 결혼을 선택한 것 자체가 동생으로부터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본다. 동생에게 애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애정에서조차 벗어나고 싶었던 것 아닐까.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은은하지만 견고하게 깔려 있는 세상의 폭력성이 고통스러웠다. 물론 더 고통스러운 건 그들의 다음 이야기였지만 분통이 터지므로 자제하겠다.


최근 외국인 가사근로자 제도 도입을 앞두고 많은 의견들이 오가고 있다. 우리 사회에 깔려 있는 돌봄 노동에 대한 평가절하, 철저하게 서민들을 노동하고 노동자를 재생산하는 존재로 보는 기득권의 인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돌봄 노동에 최저임금조차 주고 싶어하지 않는 기득권의 얄팍한 인식을 감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에 구역질이 났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을 읽고 최근의 이 이슈가 떠올랐다. '돌봄 활동이 평가 절하되는 사회적 맥락에는 이 활동이 인간의 나약함, 취약성 등을 상기시키기 때문도 있다'는 해설의 구절에 공감했다. 요즘 부쩍 약자 혐오가 심해졌다는 생각이 드는데 더 심각하게 느껴지는 건 약자 혐오를 감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세태다. 피 묻은 코끼리 얼굴을 강조한 사진을 기념사진으로 과시하는 야만적임, 그 야만성을 강함으로 착각하는 비도덕성과 멍청함이 보편적인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적어도 그런 야만성을 부끄러워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최은영의 소설은 아프다. 꽤 타인의 아픔에 민감하다고 생각하는 나보다도 더 세심한 정서를 가진 이들이 나오는 이야기들이어서 더 아프다. 이 아픔 들추기가 주는 위로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최은영의 소설을 읽는다. 즐거움이나 쾌락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내 곁을 비춰주는 다정하고 안심되는 빛줄기를 발견한 기분이랄까. 그게 아주 희미한 빛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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